예전에는 공사를 착공하거나 준공하면 기념타올을 선물하는 것이 유행했다. 지금도 그러나? 12년 전(20120817)에 아내가 보따리에서 수건 한 장을 꺼냈는데 이 수건이 나왔을 때 블로그에 포스팅하였었다. 수건으로 사용하기 시작한지 12년이 지난 셈인데 이제는 반쪽은 사라지고 걸레로 사용하는 중이다.
건설회사의 본사에 근무하면 공사입찰 절차의 하나인 현장설명에 참석할 기회가 많았다. 시화공업단지 공사와 관련하여 현장설명에 참석하려고 몇 차례 오이도 부근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위 사진은 내가 취업하여 10년이 막 지날 무렵이니 그야말로 한창 때이다. 근무하던 회사에서 시화공단 기반공사를 할 때 건축공사 현장설명에 참석하며 촬영한 듯하다. 1994년도에는 나도 시화임대공장(안산시 단원구 성곡동 672) 신축공사에 참여하였기에 더욱 친근감이 가는 시화공업단지다. 배경의 언덕 너머 해변에는 횟집이 많아서 회식할 때 왔었던 생각이 난다.
■ 계룡대체력단련장 준공 기념타올/19901008
계룡대체력단련장준공기념 1990.10. 8
대전 내동아파트현장에서 근무하고 있는데 무전기로 나를 부른다. 인근의 계룡대현장에 근무하는 건축 직원이 교통사고가 났다고 하여 급하게 토목공사 현장의 건축직으로 발령을 받았다. 이제까지 건축직이 주가 되는 건축현장에 근무할 때 설비나 전기직 처럼 한 발 물러나있는 입장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일 자체는 다를 것이 없지만 뭔가 소외된 기분이 들곤 하였다.
계룡대체력단련장/199012
고향집에서 멀지 않은 곳이기에 올여름(20240719)에도 계룡시에 밥 먹으러 간 길에 지나갔다. 주변에 심은 나무들이 무성하여 들어가는 입구만 빼꼼하게 보일 뿐이다. 준공 이후 24년이 되었는데 들어가 보지는 못하였다.
결혼 전에도 손뜨개질을 많이 했었다는 아내가 신혼 초에 만든 전자계산기 케이스이다. 결혼 후 첫 작품으로 만든지 43년쯤 지났는데 초기에 잠깐 사용했었다. 끈은 어디로 갔을까? 오랫동안 눈에 띄지 않더니 며칠 전에 우연히 찾았다. 아내가 버릴까? 하기에 강력하게 거부하였다. 혹시 블로그에 소개하지 않았을까 해서 두어 시간을 찾아보았으나 찾지 못하였다.
우리 논은 이제 주인이 두 번 바뀌었고 작년부터 큼직한 우사를 신축하는 중이다. 우마차 길은 콘크리트 포장길로 바뀌었는데 서울집을 오고갈 때 이 길을 이용하곤 한다. 지날 때마다 씁쓸하다.
대학교에 입학하며 담배를 피우기 시작하였는데 그 후 아버지께 담배를 피워야겠다고 하였더니 돈 벌면 피우라고 하셨다. 부슬비가 내리는 초여름에 아버지를 따라서 논을 매러 진티 논으로 갔다. 비가 내리니 진티 골짜기에 다른 사람은 없었다. 나는 담배가 젖지 않도록 비닐에 싸서 바지 주머니에 넣고 갔었다. 아버지는 담배나 술이나 있으면 먹고 없으면 마는 정도였다. 둘이서 논을 매는데 오랜만에 쉬었다 하자고 하신다. 아버지는 지게가 있는 곳으로 가셔서 담배를 물으셨고, 나는 아버지 눈길을 피해서 좀 멀리 길 오른쪽에 있는 개울로 내려가서 피웠다. 오전 일을 마치고 집에 와서 점심밥을 먹고 오후에 다시 논을 매러 진티 논으로 갔다. 그런데 오전과 달리 논을 매는 도중에 자주 쉬자고 하신다. 번거롭게 멀리 개울까지 가지 않고 지게 쪽으로 가신 아버지와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등지고 논에 서서 담배를 피웠었다.
홀목골/1979
포도밭/1979
왕버드나무/1979
어린시절 봄이면 버들피리를 만들기 위하여 물 오른 버들가지를 꺾어오던 왕버드나무이다. 속은 썩어서 없어졌지만 고목나무 치고는 생기가 넘쳤었다. 고향집에서 진티 논에 가려면 건너뜸 6촌형님 댁(빨간지붕) 앞을 지나서 왕버드나무 밑을 지나서 좀 으스스한 상여집 가까이를 지나서 논둑길로 다녔다. 왕버드나무 밑 길 아래로는 물이 솟아나는 조그마한 둠벙이 있어서 얼기미로 물고기를 잡으러 다닐 때에는 꼭 다녀가던 곳이기도 하다. 취직하여 서울에 살면서도 고향에 가서 찍은 사진이 어지간히 있는 편인데 왕버드나무가 찍힌 사진은 이것이 유일하지 않을까? 십 수 년 동안 고향에 다니지 않은 사이에 고사하였는지 사라졌다. 대신 80m 정도 떨어진 성북천변에 예전에는 없었던 끔직한 버드나무 한 그루(아래 사진)가 있다. 동네 분들에게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이 버드나무를 처음 보는 순간 왕버드나무가 없어진 대신 심은 나무라는 생각이 든다. 하기야 아래 사진의 버드나무 왼쪽 교량의 왼쪽 교각 위로 멀리 보이는 팽나무도 예전부터 있던 큰 팽나무 대신 심은 팽나무이다.
한국에서 본격적인 칼라텔레비전 방송을 시작(19810101)하기 2년 전에 결혼하였는데,아내가 혼수품으로 가져온 브라운관 흑백텔레비전이다. 딸내미가 유치원에 다니기 전(6세)에 피아노학원과 미술학원을 다녔는데 그 때까지도 흑백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어느날 칼라텔레비전 방송을 보려고 흑백텔레비전 브라운관을 크레파스로 색칠했다는 어린이 이야기를 듣고 우리도 칼라텔레비전을 구입하였다.
이 사진은 16년 전(2006년)에 잊은 줄 알았다가 몇 년 전에 다시 찾은 앨범에서 발견하였다. 40년 전 화곡동 우신아파트에서 살 때 촬영하였으니 아내도 흑백텔레비전인지 칼라텔레비전인지 모르겠단다. 이 사진을 '구글렌즈'로 검색해보니 똑같은 것이 흑백텔레비전이라고 나와서 알게 되었다.
군대 제대 후 취업하여 본사에서 근무하였는데 현장근무를 희망하였으나 발령을 내주지 않기에 무턱대고 현장으로 출근하여 나간 첫 번째 근무현장이다. 이 현장에는 아파트 기초공사가 끝난 이후에 발령을 받았으니 본공사는 처음부터 참여하지는 못한 셈이다. 그런데 1.8m * 1.8m 크기의 이 경비초소는 위치를 잡는 초기작업부터 직접 참여하게 되었다. 골조공사를 완료하였는데 주변의 도로공사가 시작될 무렵에 보니 경비초소가 눈에 띄게 낮게 지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확인해 보니 레벨을 보는 과정에서 착오가 생겼던 것이다. 어쩔 수 없이 기초판 상부의 구조물을 철거하고 다시 시공하였지만 나에게는 처음부터 끝까지 참여한 최초의 건물인 셈이다. 지금은 오래 전에 재건축공사(간석풍림아이원아파트/사용승인일20040918)로 예전 모습은 사라졌지만 도로 건너편에 KT 건물이 있어서 위치를 어느 정도 짐작은 할 수 있다.
서울 둔촌아파트/197905
두 번째 현장.....
여기도 재건축공사(철거시작/20190411)가 진행되고 있어서 옛 모습은 사라졌다. 다시 뵐 수 없는 홍ㅇ진님....
포항 송도부두방파제(신혼여행 중)/197904
앨범이 아니라 정리하지 않은 사진을 넣어둔 봉투에서 공사현장 관련 사진과 함께 발견되었다. 표정이 자연스러워서 디지털 사진으로 만들어서 블로그에 포스팅하려고 장소와 시간을 찾아보았으나 전혀 자료가 없다. 정장을 하고 바닷가에 갔으니 공사입찰 전에 실시하는 현장설명이 유력할 텐데 이런 모양의 바위가 있을만한 곳이 기억나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어디인지 전혀 모르겠다.'라고 표시하였다. 포스팅할 초안을 평소처럼 아내에게 보여주며 검토를 부탁했는데 이 사진을 보더니 복장이 신혼여행 때와 같다고 한다. 급히 신혼여행 사진을 찾아보았다. 포항 보경사로 신혼여행을 다녀왔으니 그렇다면 포항 송도부두방파제의 현재 하얀 등대가 있는 쪽이리라는 생각과 같이 아내가 같은 바위에서 촬영한 사진이 있다. 둔촌아파트 현장에서 근무할 때 결혼하였다.
콘크리트 타설작업을 해야 하는데 폭설이 내렸다. 이전에 근무하였던 두 현장에서는 안전장구에 착용에 대한 개념이 없었던 것과 달리 안전모와 안전화 및 안전각반 착용을 철저하게 준수하였다. 안전모는 '턱끈 조이고...'가 기본이었다.
서울 광화문/1980
세 번째 현장.....
앞의 두 현장은 가설사무실을 합판과 골함석으로 지었지만 여기는 우리회사 건축공사현장 최초로 조립식으로 지었다. 실내 직통계단에 소음방지 차원에서 카펫을 깔고, 이제까지 타 현장의 군대 내무반형 직원숙소가 아니라 개인별 침실을 만들었다. 침대는 각재와 합판으로 만들고 남대문시장에서 구입한 매트리스를 사용하였으며 개인별 사물함이 있었다. 대신 야간에는 당번을 정하여 숙직도 하였다. 현장의 특수성을 고려한 조치였지만 회사 내부에서 헛소문도 나돌았고, 부러움과 눈총을 많이 받았었다.
금연을 하려고 마른 오징어, 사탕, 은단, 껌을 사용하였는데 한 달이면 몸무게가 1kg 증가하여 살을 빼기 위하여 평소 시내버스를 승하자하는 곳보다 한 정거장 이전을 이용하여 뛰어 다녔다. 동네 분이 좀 일찍 나서서 걸어 다니라는 말을 듣기도하였다. 두 번의 시도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현장 부근의 오방떡도 유명했다.
서울 광화문/1980
현장에 근무하며 중앙대학교에서 현장소장 및 본사 임원과 함께 PERT/CPM 일정관리 교육을 받았다. 화콤 컴퓨터로 전산실습을 하였는데 코딩용지에 코딩해 주면 키펀처가 펀칭카드(천공카드)를 천공해 주었다. 흰색 실내화를 신고 공기조화설비가 된 전산실에 들어가서 펀치카드를 카드 리더기에 입력 시키는데 에러가 난 펀치카드는 직접 펀치를 하기도 하였다. 다른 분야에 있는 분이 펀치카드를 한아름 안고 와서 카드리더기로 주루룩 입력 시키고 돌아서자마자 프린터에서 결과가 인쇄되는 소리가 들리기에 빠른 처리속도에 감탄을 하였다. 그러나 PERT/CPM 일정관리 실습자료는 펀치카드 전체의 두께가 5cm쯤 되는데 입력시키고 나면 표시램프가 번쩍번쩍하며 한참을 기다려야 결과가 인쇄되기에 엄청 어려운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1980년 5·18민주화운동으로 학교가 폐쇄되어 6개월간의 교육기간이 많이 지체되기도 하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당시가 어마어마한 시기였는데 거의 모르고 지냈다.
서울 광화문/1980
견적실/198509 : Apple 2e ( Apple사 / CPU 65C02(8BIT) 3Mhz / RAM : 64Kb Apple soft basic 내장 / 보조기억장치 : FDD 5.25인치(2D) / 80칼럼 텍스트모드, 고해상 그래픽모드(560X192)) 대학교를 졸업하고 군대에서 제대 한 후 취업하여 세 번째 옮긴 회사이다. 당시에는 중동의 건설 붐으로 기술인력이 부족하던 때였는데 회사를 옮기는 것도 따르던 상급자가 옮기면 단체로 따라서 움직이곤 하였다. 두 번째는 상급자를 뒤따라 나중에 옮겼지만, 세 번째는 먼저가 있으면 따라가마 해서 먼저 옮겼다. 그런데 차질이 생겨서 일부가 합류하지 못하였다.
처음 취업을 한 이후로 현장근무도 하였지만 상당기간은 본사에서 견적업무를 하였다. 이 당시만 해도 건설회사의 업무를 전산화하려는 시도가 회사마다 진행되고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1983년도에 8비트 퍼스널컴퓨터인 TriGen-20을 가지고 있어서 Applesoft BASIC도 배운 터였다. 회사에서 사우디현장을 철수하며 Apple 2e 퍼스널컴퓨터를 가지고 왔는데 기술부(견적실)에 두고 견적업무 전산화에 대한 단편적인 시도를 하였었다. 점심시간에는 부서원들이 스낵바이트(Snake Bite) 게임을 하였는데 지금까지 내가 할 줄 아는 유일한 컴퓨터 게임이었다. 당시에는 Excel(스프레드쉬트)의 초기제품인 VisiCalc(비지칼크)를 사우디현장을 철수하며 가지고 왔기에 공부해서 간단한 것에 사용하였다. 모든 명령어(인쇄→/P 등..... )를 외워야하기에 만만치 않았다.
견적실/1981~1989 : 미니컴퓨터 터미널
건설회사 업무의 전산화 차원에서 부서마다 다른 자재 및 공정코드를 통일하는 작업이 이루어졌고, 전산부와 합동으로 미니컴퓨터에 COBOL(코블)을 이용하여 내역서 작성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견적내역서 및 실행내역서 작성에 활용하였다.
견적실/1981~1989 : Pro-2000 (대우통신 / CPU 8088(16bit) 4.77Mhz / RAM 512Kb / Video CGA / FDD 5.25인치)
회사에서 최초로 구입해 준 16bit 컴퓨터...., 스프레드쉬트로 셈벗이 있었으나 LOTUS 1-2-3를, 워드프로세서로 글벗이 있었으나 조합형 한글을 사용하는 대우통신의 Pro-Word(Omniword), 프로그래밍언어로 Basic A를 활용하였다. 데이터베이스로 dBASE 3 plus, 프로그래밍언어로 Turbo Pascal을 공부하기도 하였지만 자유자재로 활용하지는 못하였다. 무엇이든 할 수 있겠다는 생각과 하고 싶은 것은 많았지만 본업을 팽개치고 전념할 엄두를 내지 못하였으니 제대로 하지는 못하였다. 이 당시가 한국에서 견적관련 프로그램이 개발되기 시작하던 무렵이었다.
견적실/1981~1989
입사하니 건축 견적실이 처음 생겨나서 첫 번째 견적작업이 마무리 단계였다. 새로 입사하였기에 첫 번째에는 참여하지 못하였다. 건축 견적실이 생기기 전까지는 견적의뢰가 들어오면 현장에서 근무하다가 본사에서 대기하는 직원들로 임시팀을 만들어서 견적작업을 하였기에 통일성이 없었다. 직전 직장에서 주로 견적작업을 하였기에 골조 및 마감재 견적양식은 전 직장에서 사용하던 양식으로 통일하고 견적서 작성시 공종명과 순서는 건축표준품셈을 참조하여 통일시켰었다.
대부분의 견적작업은 도면을 펼쳐놓을 수 있는 커다란 좌식상이 있는 단골 숙박업소를 이용하여 밤과 낮, 휴일을 가리지 않고 작업하였다. 삼각스케일과 손계산기를 사용하고 도면에 작업을 마친 부분을 형광펜으로 표시하며 견적양식에 샤프로 계산식을 써나갔다. 계산식을 쓴 견적양식은 본사에서 근무하는 직원에게 계산 및 검산을 부탁하기도 하였다.
견적실/1981~1989
계산식을 쓰는 부분과 부위(F/바닥, B/걸레받이, W/벽체, C/천장 ,M/반자돌림, 기타)별로 마감재 수량을 집계하는 마감재 견적양식.
견적실/19870219
왼손잡이라 왼손으로 손계산기 사용이 빨랐다.
견적실/19870219??
사진을 살펴보니 눈이 부셔서 스탠드를 천장으로 향하고, 주변에는 도면이 널브러져 있고, 이불에 앉아서 견적작업을 하는 35년 전의 전형적인 견적잡업 모습이다. 삼각스케일이 놓여있는 자료는 옆에 구멍이 난 것으로 보아 컴퓨터로 출력한 것이다. 지압기를 든 손가락만 보이는 분은 지금은 제주도에 살고 있는 이ㅇ형님인데 초상권 차원에서 얼굴은 크롭하였다.
견적실/19870923
본사에서 근무할 때에는 편수나 양수형 철제책상을 주로 사용하는데 대형도면 등 책상에 올려놓을 것이 많아서 회의용 탁자와 철제 3단 서랍장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프로그래밍 관련 자료가 들어있는 다홍색 파일은 35년이 지난 지금도 가지고 있다.
전산부/1991~1993
건축 견적실에 근무하며 기술업무 전산화작업을 병행하기에는 한계가 있어서 진전이 없었다. 해외에서 자재를 담당하다 퇴사하여 어셈블리어를 공부한 분을 도와서 건축분야 견적업무 전산화를 시도하였다. 컴퓨터 성능이 시원치 않던 시절이라 다른 프로그레밍 언어로는 처리속도가 느려서 실용성이 부족하던 때였다. 그 분은 건축분야를, 나는 어셈블리어를 잘 모르는 상태에서 협업하여 건축 골조공사 적산작업을 전산화하였다. 사용해 보니 되기는 하는데 수작업 방법과 너무 동떨어져서 입력순서가 어색하여 수정하자니 결과가 맞으면 되는 것이 아니냐는 입장이다.
그 무렵 회사차원에서 전산부에 가서 업무전산화에 전념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안에 덥석 응하여 2년 4개월 동안 전산부에서 근무하였다. 일위대가표와 내역서를 연계하는 등의 성과는 있었지만 내가 잘 모르는 COBOL 언어로 프로그레밍하는 직원에게 건축분야를 이해시켜서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작업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당시에는 관공사 현장(주로 토목공사)에서 PC를 이용하여 공정보고 등을 하는 추세이기에 현장에서 사용하는 PC에 모뎀을 설치하기 위하여 토목공사현장을 방문할 때 동행하기도 하였다. 전산부에 근무할 때 처음으로 노트북을 사용하였다.
안산 시화공단 오이도 부근/198X
현장설명에 참석하는 길에....
사내 써클활동으로 사진반에서/198X
대전 내동아파트/1990
네 번째 건축공사 현장에서 처음으로 합판거푸집 대신 유로폼거푸집을 사용하였다. 당시에는 거푸집공사가 전문공사업체 개념이라기보다 모든 자재를 시공회사에서 제공하고 업체는 인력만 제공하거나 일부 못과 철선 정도를 부담하는 추세였다. 그러니 각재와 합판과 동바리 등의 가설재와 못과 철선도 규격별로 업체의 지원을 받기도 하면서 건축기사가 산출하고 본사에 자재를 청구하여 업체에 제공하였다. 유로폼은 10년 전 서울 둔촌동 현장에 근무할 때 한양주택 현장에서 시공하는 모습을 먼발치에서 보았었다. 해외현장에서는 사용했다던데 국내현장에는 도입초기라서 작업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는 모습을 보며 시큰둥하게 생각하기도 하였었다. 그런데 내동현장의 거푸집공사 업체가 익숙하지는 않지만 시공한 경험만 있을 뿐 자재 소요량을 산출 할 능력은 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유로폼에 대한 경험은 없지만 공급업체의 도움을 받아서 기본판넬과 강관 및 부품의 소요량과 코팅합판으로 제작하는 요철거푸집 및 슬래브거푸집에 필요한 자재수량을 산출하였다. 일부 특수부품도 제작하였지만 거푸집공사가 끝나서 자재를 반출 할 때 보니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부품이 꽤 많이 발견되었다. 작업자가 해당부품을 찾아 헤매느니 합판과 각재로 제작하여 사용하였기에 생긴 일이었다.
본사와 서울근교 현장에서 근무하다가 처음 지방으로 발령을 받은 곳이 대전이다. 초기에는 가까운 성북동 고향집에서 승용차로 출퇴근하였지만 후에 1년은 대전 태평동으로 이사하였다. 딸내미가 초등학교 3학년이고 아들내미가 유치원 다닐 때였다.
계룡/199012
대전 내동아파트현장에서 근무하고 있는데 무전기로 나를 부른다. 인근의 계룡현장에 근무하는 건축 직원이 교통사고가 났다고 하여 급하게 토목공사 현장의 건축직으로 발령을 받았다. 이제까지 건축직이 주가 되는 건축현장에 근무할 때 설비나 전기직 처럼 한 발 물러나있는 입장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일 자체는 다를 것이 없지만 뭔가 소외된 기분이 들곤 하였다. 고향집에서 멀지 않은 곳이기에 요즈음도 가끔 지나게 되는데 주변에 심은 나무들이 무성하여 들어가는 입구만 빼꼼하게 보일 뿐이다.
구미(직업훈련원)/199602
취업 이후 40년이 지난 5년 까지도 기회가 되면 건축 견적업무를 하였다. 건설회사에 근무할 때에는 현장에서 근무를 하더라도 견적작업이 우선이었다. 현장이 개설될 때부터 근무하더라도 현장의 실행예산 작성이 완료되면 새로 시작하거나 문제가 있는 현장으로 다시 발령이 나곤하여 마치 불을 끄는 소방요원 같은 느낌이 들었다. 취업 후 구미현장으로 가기까지 8개 현장을 거치는 동안 처음부터 마감공사까지 마친 현장은 둔촌아파트현장이 유일하다. 구미현장은 현장소장으로 발령을 받은 최초의 현장이었는데 현장소장으로서의 능력이 부족한 탓도 있었겠지만 온전히 끝내 본 현장이 있었냐는 물음에 할 말을 잊기도 했었다.
구미(사원주택)/199602
준공 후 10년쯤 지나서 아파트단지가 들어서며 철거되고 그 자리에 구미광평프르지오(200610 분양)가 들어섰다. 내가 공사에 참여한 가장 단명한 건물이 아닐까?
구미(장폭 부직포공장)/199602
서울집에서 먼 곳이기에 주말부부로 살았다. 초기에는 컨테이너 숙소에서 생활했는데 겨울이 되자 전기난로를 켠 쪽은 뜨겁고 반대쪽은 얼굴이 시릴 정도로 환경이 열악하였다. 그룹사의 주선으로 기숙사의 뜨끈한 방에서 생활하기도 하였지만 마냥 신세를 질 수 없어서 봉한리 삼우아파트에 직원 숙소를 마련하였다. 한창 아마추어무선(HAM/호출부호 DS1CFN)에 심취해 있을 때로 객지생활을 하는데 많은 위안이 되었다. 당시 그룹사의 주차장에는 아마추어무선용 휩안테나를 설치한 차량이 수십 대에 이를 정도로 유행이었다. 아마추어무선사인 건자재 단골집 사장님을 통하여 아마추어무선용품 취급업체와도 가깝게 지내는 등 활발한 아마추어무선 활동을 하였었다. 삼풍백화점 붕괴사고(19950625) 수습과정에서 활약하는 동료 아마추어무선사들의 활동을 무선 통신을 들으며 서울집으로 왔던 기억도 생생하다.
서울 성산동/19970929
현장개설 초기에 아내와 같이 가서 공사현장 출입구 위치를 잡았었다. 공사 중 이미 난지도 쓰레기처리장 철거와 관련된 민원제기 경험이 풍부한 인근 아파트 주민들의 민원제기가 일보다 힘들었지만 준공할 때 축하화분을 가져올 만큼 인근 초등학교와 더불어 공을 들였었다.
인천 영종도 해변/1987
가끔 인천국제공항 남쪽해변길인 영종해안남로를 지날 때면 인천 월미도선착장에서 배 타고 영종도에서 버스 타고 놀러왔던 생각이 난다.
이 흰 점퍼는 대전 내동현장 및 계룡현장에서 근무할 때에도 입고 있었다. 겨울철에 해넘이를 보며 찍었을 텐데 언제 어디인지 모르겠다. 만리포해수욕장과 대천해수욕장과 영흥도 장경리해수욕장 및 십리포해수욕장과 용유도해수욕장은 로드뷰로 확인해 보았는데 아닌 것 같다. 어딘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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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하게 쓰려고 시작하였는데 쓰다 보니 일부는 지우기도 하였지만 생각보다 엄청 길어졌다. 이제 많은 부분이 기억에서 사라졌고 다시 안전진단업체에서 일하기 시작하기 이전의 건설회사 시절의 내용을 쓸 기회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루 종일 썼다.
59년 전(19631019) 새벽에 대전 성북동에서 진티고개를 넘어 시오리를 걸어서 두계역(현 계룡역)에서 증기기관차가 끄는 기차를 타고 군산으로 수학여행을 다녀왔다. 군산내항에서 배를 타고 장항제련소를 다녀왔는데 산 위에 있는 커다란 굴뚝, 검고 날카로운 슬래그로 해변을 메운 땅, 광차에 담긴 금광석을 보았고 용광로에서 제련하는 과정에 대한 설명을 들은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군산은 월명공원에 올라가서 군산내항을 내려다 본 기억이 남아있다.
국민학교 수학여행(군산 월명공원에서)/19631019
동네 친구(남자) 7명 중에서 윤ㅇ환은 빠졌다. 오른쪽 끝에.....
국민학교 수학여행(군산 월명공원에서)/19631019
왼쪽에서 두 번째.....
57년 후(20200512)에 다시 찾은 군산 월명공원의 전망대는 그대로인데 주변에 나무가 자라서 군산내항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국민학교 졸업사진/19640129
위에서 둘째 줄 왼쪽에서 열한 번째.....
■중학교
중3/1966
■고등학교
고3/19690430
고3/19690918
고3/19691007
구례 화엄사/19700212
고등학교 졸업식은 했는지 모르겠지만 대학교 입학시험을 마치고 친구와 셋이서 여행을 다녀왔다.
■대학교
무등산인지 월출산인지 모르겠다.
대학교 시절 학과 암실을 이용할 때에는 사진촬영을 하면 동네현상소(DP점)에서는 네거티브 필름의 현상작업만 하였다. 대학교 학과 암실에서 네거티브 필름을 확대기로 인화지에 감광시킨 후 집에 가지고 와서 다락방에 만든 암실에서 현상액과 정착액으로 인화작업을 하곤 하였다. 인화작업을 잘 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실패를 반복해가며 실력을 향상시켜 나아갔었다. 위 사진은 폼이 자연스럽고 잘 나온 편이었기에 여러 번 인화작업을 하여 지금도 사진이 여러 장 남아 있다. 그러나 정작 디지털 사진으로 만든 원본사진은 사진 표면이 올록볼록하고 모서리가 둥근 것으로 보아 동네현상소에서 인화한 것이다.
대학교 졸업/19740227
■군대
기초군사훈련 수료기념(증평)/1974
부산 자대에서/197X
부산 자대에서/197X
197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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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곡동에서 이사(200608)하는 과정에서 어려서부터 결혼하기 전까지의 사진과 졸업앨범을 몽땅 잊어버렸다고 생각하였었다. 그런데 몇 년 전에 네 째가 고향집에서 챙겼다며 택배로 보내왔다. 차일피일 미루다가 요즈음에야 디지털 사진으로 만들었다. 어차피 내 자신에게나 소중한 자료일 뿐이 아닐까?
취학 전 유일한 사진이다. 한복을 입고 버선을 신고 형님의 중학교 모자를 쓰고 고향집 마루에서 촬영한 66년 전의 내 모습이다. 네 째가 돌이 되기 전(한살)으로 형님이 중1 때 사진관에서 카메라를 빌려와서 찍은 것으로 알고 있다. 형님이 대전으로 중학교 다닐 때이고, 네 째의 손과 머리 등의 모습으로 보아 두 살 이전(그 나이 때 손자들 사진과 비교 분석함)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화곡동에서 이사(200608)하는 과정에서 어려서부터 결혼하기 전까지의 사진과 졸업앨범을 몽땅 잊어버렸다고 생각하였었다. 그런데 몇 년 전에 네 째가 고향집에서 챙겼다며 택배로 보내왔다. 언젠가 추려서 디지털 사진으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차일피일하다 요즈음에야 실행에 옮겼다. 많은 사진을 디지털 사진으로 만들고 싶지만 앨범에 있는 사진을 디지털카메라로 촬영하여 간단한 보정작업을 하는 수준이기에 몇 장 만 골랐다. 어차피 내 자신의 추억거리 일 뿐이고 다른 식구들의 관심거리는 아니지 않을까?
강진 여행길에 무의사 부근과 강진다원에서 월출산을 가까이에서 보게 되었다. 가족들도 이미 이야기를 들어서 알기는 하겠지만 나처럼 옛 추억에 설레지는 않았겠지. 고등학교 3학년 때 요즈음 대학수학능력시험에 해당하는 예비고사를 마치고 교련복 차림으로 고향 뒷산인 금수봉을 오른 것을 시작으로 대학교에 입학한 1970년도부터 등산을 시작하였다. 운동신경이 둔해서 공처럼 둥그런 것을 이용하는 모든 운동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는 처지라 등산에 매달렸는지도 모른다. 그 시절의 등산관련 정보는 잡지나 신문을 통해서 얻었는데 평소에 신문 기사를 스크랩하기도 하고, 유명한 산에 대한 정보를 정리해서 기록해 두었던 노트는 지금도 가지고 있다. 월출산을 알게 된 계기가 된 것은 마애석불이 발견되었다는 신문 기사였다.
1970년 가을 혼자서 해질 무렵에 영암 회문리에 도착하였다. 구릉지 밭에서 고구마를 캐고 집으로 돌아가려는 노부부에게 월출산 오르는 길을 물었다. 막대기로 땅바닥에 그림을 그려가며 길을 알려주신다. 무지기통?? 이란 말씀을 여러 번 했는데 뭔 말씀(폭포?)인지 알아듣지 못하였다. 설명을 끝내며 어차피 저녁때인데 집에 가서 자고 가라신다. 야영준비를 해오기도 했지만 숫기가 없는 성격이라 굳이 사양하고 되돌아섰으나 멀리 가지 못하고 고구마 밭 근처에서 야영을 하였다. 이튿날 아침에 일어나니 할머니께서 개다리소반에 밥을 차려서 들고 오셨다. 이날 월출산 정상에 올라서 능선을 따라 구정봉을 지나 마애석불을 찾았으나 찾지는 못하였다. 월출산에서 내려와서 고맙다는 인사차 노부부 댁을 찾아갔다. 문패를 보니 친구 아버님과 같은 [강보성]님이라 45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그 무렵 진안 마이산에 갔을 때 받은 후의와 함께 잊히지 않는 특별한 추억거리가 되었다. 그리고 1974년 군 입대를 기념해서 다시 한 번 월출산에 올랐었다.
월출산/197407말(군 입대 직전) - 결혼하기 이전의 사진은 이사하며 모두 잃어버렸다고 단념했는데 동생이 고향집에서 찾았다고 챙겨주었다. 내 모습이 나도 낯설다.
강진다원에서 보이는 월출산(구글어스로 확인해 보니 최고봉은 다원 중간에 보이는 구조물 방향이고 구정봉은 왼쪽 뾰쪽산 뒤쪽이다)
갑자기 궁금증이 발동하여 엊저녁(2016.04.15)부터 오늘 오전까지 인터넷도 검색하고 나의 옛날 여행 자료도 확인하였다. 월출산에 오른 날짜는 찾지 못하였지만, 1970년 2월 18일자 동아일보에 월출산마애여래좌상이 발견되었다는 기사가 있고, 특별한 후의를 받은 기억이 있는 마이산에 다녀온 것이 1971년 4월 17일이고, 월출산마애여래좌상이 국보 제144호로 지정 된 것이 1972년 3월 2일이다. 아래의 옛날 여행 자료는 원래 검정 볼펜으로 작성하였으나 청색 볼펜으로 추가한 것이다. 유천동에 살았으니 서대전역에서 보통급행 열차(480원)를 타고 나주에서 내려서 영암까지 버스(90원?)로 가서 회문리까지 걸어서 갔다. 옛날 여행 자료에서 떨어져 나간 신문 스크랩은 월출산에 갈 때 노트 전체를 가져가지 않고 간편하게 스크랩한 기사만 떼어 간 듯하다. 일부 남아 있는 내용을 당시 동아일보 기사와 대조해 보니 같은 문구가 없는 것으로 보아 동아일보는 아니다. 또한 노부부가 고구마 수확을 하던 밭을 인터넷 지도와 구글어스에서 찾아보았으나 45년 전의 모습이 남아 있지도 않고 기억과 일치하는 곳은 없다. 다만 기찬랜드 부근이 아닐까 짐작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