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주안아파트/1979
군대 제대 후 취업하여 본사에서 근무하였는데 현장근무를 희망하였으나 발령을 내주지 않기에 무턱대고 현장으로 출근하여 나간 첫 번째 근무현장이다. 이 현장에는 아파트 기초공사가 끝난 이후에 발령을 받았으니 본공사는 처음부터 참여하지는 못한 셈이다. 그런데 1.8m * 1.8m 크기의 이 경비초소는 위치를 잡는 초기작업부터 직접 참여하게 되었다. 골조공사를 완료하였는데 주변의 도로공사가 시작될 무렵에 보니 경비초소가 눈에 띄게 낮게 지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확인해 보니 레벨을 보는 과정에서 착오가 생겼던 것이다. 어쩔 수 없이 기초판 상부의 구조물을 철거하고 다시 시공하였지만 나에게는 처음부터 끝까지 참여한 최초의 건물인 셈이다. 지금은 오래 전에 재건축공사(간석풍림아이원아파트/사용승인일20040918)로 예전 모습은 사라졌지만 도로 건너편에 KT 건물이 있어서 위치를 어느 정도 짐작은 할 수 있다.
서울 둔촌아파트/197905
두 번째 현장.....
여기도 재건축공사(철거시작/20190411)가 진행되고 있어서 옛 모습은 사라졌다. 다시 뵐 수 없는 홍ㅇ진님....
포항 송도부두방파제(신혼여행 중)/197904
앨범이 아니라 정리하지 않은 사진을 넣어둔 봉투에서 공사현장 관련 사진과 함께 발견되었다. 표정이 자연스러워서 디지털 사진으로 만들어서 블로그에 포스팅하려고 장소와 시간을 찾아보았으나 전혀 자료가 없다. 정장을 하고 바닷가에 갔으니 공사입찰 전에 실시하는 현장설명이 유력할 텐데 이런 모양의 바위가 있을만한 곳이 기억나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어디인지 전혀 모르겠다.'라고 표시하였다. 포스팅할 초안을 평소처럼 아내에게 보여주며 검토를 부탁했는데 이 사진을 보더니 복장이 신혼여행 때와 같다고 한다. 급히 신혼여행 사진을 찾아보았다. 포항 보경사로 신혼여행을 다녀왔으니 그렇다면 포항 송도부두방파제의 현재 하얀 등대가 있는 쪽이리라는 생각과 같이 아내가 같은 바위에서 촬영한 사진이 있다. 둔촌아파트 현장에서 근무할 때 결혼하였다.
[출처] 신혼여행(1979. 04) 때 다녀온 해변이 어딜까?/20190519..... https://hhk2001.tistory.com/5954
서울 둔촌아파트/197911
서울 둔촌아파트/197911
198x
서울 광화문/1980
콘크리트 타설작업을 해야 하는데 폭설이 내렸다. 이전에 근무하였던 두 현장에서는 안전장구에 착용에 대한 개념이 없었던 것과 달리 안전모와 안전화 및 안전각반 착용을 철저하게 준수하였다. 안전모는 '턱끈 조이고...'가 기본이었다.
서울 광화문/1980
세 번째 현장.....
앞의 두 현장은 가설사무실을 합판과 골함석으로 지었지만 여기는 우리회사 건축공사현장 최초로 조립식으로 지었다. 실내 직통계단에 소음방지 차원에서 카펫을 깔고, 이제까지 타 현장의 군대 내무반형 직원숙소가 아니라 개인별 침실을 만들었다. 침대는 각재와 합판으로 만들고 남대문시장에서 구입한 매트리스를 사용하였으며 개인별 사물함이 있었다. 대신 야간에는 당번을 정하여 숙직도 하였다. 현장의 특수성을 고려한 조치였지만 회사 내부에서 헛소문도 나돌았고, 부러움과 눈총을 많이 받았었다.
금연을 하려고 마른 오징어, 사탕, 은단, 껌을 사용하였는데 한 달이면 몸무게가 1kg 증가하여 살을 빼기 위하여 평소 시내버스를 승하자하는 곳보다 한 정거장 이전을 이용하여 뛰어 다녔다. 동네 분이 좀 일찍 나서서 걸어 다니라는 말을 듣기도하였다. 두 번의 시도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현장 부근의 오방떡도 유명했다.
서울 광화문/1980
현장에 근무하며 중앙대학교에서 현장소장 및 본사 임원과 함께 PERT/CPM 일정관리 교육을 받았다. 화콤 컴퓨터로 전산실습을 하였는데 코딩용지에 코딩해 주면 키펀처가 펀칭카드(천공카드)를 천공해 주었다. 흰색 실내화를 신고 공기조화설비가 된 전산실에 들어가서 펀치카드를 카드 리더기에 입력 시키는데 에러가 난 펀치카드는 직접 펀치를 하기도 하였다. 다른 분야에 있는 분이 펀치카드를 한아름 안고 와서 카드리더기로 주루룩 입력 시키고 돌아서자마자 프린터에서 결과가 인쇄되는 소리가 들리기에 빠른 처리속도에 감탄을 하였다. 그러나 PERT/CPM 일정관리 실습자료는 펀치카드 전체의 두께가 5cm쯤 되는데 입력시키고 나면 표시램프가 번쩍번쩍하며 한참을 기다려야 결과가 인쇄되기에 엄청 어려운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1980년 5·18민주화운동으로 학교가 폐쇄되어 6개월간의 교육기간이 많이 지체되기도 하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당시가 어마어마한 시기였는데 거의 모르고 지냈다.
서울 광화문/1980
견적실/198509 : Apple 2e ( Apple사 / CPU 65C02(8BIT) 3Mhz / RAM : 64Kb Apple soft basic 내장 / 보조기억장치 : FDD 5.25인치(2D) / 80칼럼 텍스트모드, 고해상 그래픽모드(560X192))
대학교를 졸업하고 군대에서 제대 한 후 취업하여 세 번째 옮긴 회사이다. 당시에는 중동의 건설 붐으로 기술인력이 부족하던 때였는데 회사를 옮기는 것도 따르던 상급자가 옮기면 단체로 따라서 움직이곤 하였다. 두 번째는 상급자를 뒤따라 나중에 옮겼지만, 세 번째는 먼저가 있으면 따라가마 해서 먼저 옮겼다. 그런데 차질이 생겨서 일부가 합류하지 못하였다.
처음 취업을 한 이후로 현장근무도 하였지만 상당기간은 본사에서 견적업무를 하였다. 이 당시만 해도 건설회사의 업무를 전산화하려는 시도가 회사마다 진행되고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1983년도에 8비트 퍼스널컴퓨터인 TriGen-20을 가지고 있어서 Applesoft BASIC도 배운 터였다. 회사에서 사우디현장을 철수하며 Apple 2e 퍼스널컴퓨터를 가지고 왔는데 기술부(견적실)에 두고 견적업무 전산화에 대한 단편적인 시도를 하였었다. 점심시간에는 부서원들이 스낵바이트(Snake Bite) 게임을 하였는데 지금까지 내가 할 줄 아는 유일한 컴퓨터 게임이었다. 당시에는 Excel(스프레드쉬트)의 초기제품인 VisiCalc(비지칼크)를 사우디현장을 철수하며 가지고 왔기에 공부해서 간단한 것에 사용하였다. 모든 명령어(인쇄→/P 등..... )를 외워야하기에 만만치 않았다.
견적실/1981~1989 : 미니컴퓨터 터미널
건설회사 업무의 전산화 차원에서 부서마다 다른 자재 및 공정코드를 통일하는 작업이 이루어졌고, 전산부와 합동으로 미니컴퓨터에 COBOL(코블)을 이용하여 내역서 작성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견적내역서 및 실행내역서 작성에 활용하였다.
견적실/1981~1989 : Pro-2000 (대우통신 / CPU 8088(16bit) 4.77Mhz / RAM 512Kb / Video CGA / FDD 5.25인치)
회사에서 최초로 구입해 준 16bit 컴퓨터...., 스프레드쉬트로 셈벗이 있었으나 LOTUS 1-2-3를, 워드프로세서로 글벗이 있었으나 조합형 한글을 사용하는 대우통신의 Pro-Word(Omniword), 프로그래밍언어로 Basic A를 활용하였다. 데이터베이스로 dBASE 3 plus, 프로그래밍언어로 Turbo Pascal을 공부하기도 하였지만 자유자재로 활용하지는 못하였다. 무엇이든 할 수 있겠다는 생각과 하고 싶은 것은 많았지만 본업을 팽개치고 전념할 엄두를 내지 못하였으니 제대로 하지는 못하였다. 이 당시가 한국에서 견적관련 프로그램이 개발되기 시작하던 무렵이었다.
견적실/1981~1989
입사하니 건축 견적실이 처음 생겨나서 첫 번째 견적작업이 마무리 단계였다. 새로 입사하였기에 첫 번째에는 참여하지 못하였다. 건축 견적실이 생기기 전까지는 견적의뢰가 들어오면 현장에서 근무하다가 본사에서 대기하는 직원들로 임시팀을 만들어서 견적작업을 하였기에 통일성이 없었다. 직전 직장에서 주로 견적작업을 하였기에 골조 및 마감재 견적양식은 전 직장에서 사용하던 양식으로 통일하고 견적서 작성시 공종명과 순서는 건축표준품셈을 참조하여 통일시켰었다.
대부분의 견적작업은 도면을 펼쳐놓을 수 있는 커다란 좌식상이 있는 단골 숙박업소를 이용하여 밤과 낮, 휴일을 가리지 않고 작업하였다. 삼각스케일과 손계산기를 사용하고 도면에 작업을 마친 부분을 형광펜으로 표시하며 견적양식에 샤프로 계산식을 써나갔다. 계산식을 쓴 견적양식은 본사에서 근무하는 직원에게 계산 및 검산을 부탁하기도 하였다.
견적실/1981~1989
계산식을 쓰는 부분과 부위(F/바닥, B/걸레받이, W/벽체, C/천장 ,M/반자돌림, 기타)별로 마감재 수량을 집계하는 마감재 견적양식.
견적실/19870219
왼손잡이라 왼손으로 손계산기 사용이 빨랐다.
견적실/19870219??
사진을 살펴보니 눈이 부셔서 스탠드를 천장으로 향하고, 주변에는 도면이 널브러져 있고, 이불에 앉아서 견적작업을 하는 35년 전의 전형적인 견적잡업 모습이다. 삼각스케일이 놓여있는 자료는 옆에 구멍이 난 것으로 보아 컴퓨터로 출력한 것이다. 지압기를 든 손가락만 보이는 분은 지금은 제주도에 살고 있는 이ㅇ형님인데 초상권 차원에서 얼굴은 크롭하였다.
견적실/19870923
본사에서 근무할 때에는 편수나 양수형 철제책상을 주로 사용하는데 대형도면 등 책상에 올려놓을 것이 많아서 회의용 탁자와 철제 3단 서랍장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프로그래밍 관련 자료가 들어있는 다홍색 파일은 35년이 지난 지금도 가지고 있다.
전산부/1991~1993
건축 견적실에 근무하며 기술업무 전산화작업을 병행하기에는 한계가 있어서 진전이 없었다. 해외에서 자재를 담당하다 퇴사하여 어셈블리어를 공부한 분을 도와서 건축분야 견적업무 전산화를 시도하였다. 컴퓨터 성능이 시원치 않던 시절이라 다른 프로그레밍 언어로는 처리속도가 느려서 실용성이 부족하던 때였다. 그 분은 건축분야를, 나는 어셈블리어를 잘 모르는 상태에서 협업하여 건축 골조공사 적산작업을 전산화하였다. 사용해 보니 되기는 하는데 수작업 방법과 너무 동떨어져서 입력순서가 어색하여 수정하자니 결과가 맞으면 되는 것이 아니냐는 입장이다.
그 무렵 회사차원에서 전산부에 가서 업무전산화에 전념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안에 덥석 응하여 2년 4개월 동안 전산부에서 근무하였다. 일위대가표와 내역서를 연계하는 등의 성과는 있었지만 내가 잘 모르는 COBOL 언어로 프로그레밍하는 직원에게 건축분야를 이해시켜서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작업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당시에는 관공사 현장(주로 토목공사)에서 PC를 이용하여 공정보고 등을 하는 추세이기에 현장에서 사용하는 PC에 모뎀을 설치하기 위하여 토목공사현장을 방문할 때 동행하기도 하였다. 전산부에 근무할 때 처음으로 노트북을 사용하였다.
안산 시화공단 오이도 부근/198X
현장설명에 참석하는 길에....
사내 써클활동으로 사진반에서/198X
대전 내동아파트/1990
네 번째 건축공사 현장에서 처음으로 합판거푸집 대신 유로폼거푸집을 사용하였다. 당시에는 거푸집공사가 전문공사업체 개념이라기보다 모든 자재를 시공회사에서 제공하고 업체는 인력만 제공하거나 일부 못과 철선 정도를 부담하는 추세였다. 그러니 각재와 합판과 동바리 등의 가설재와 못과 철선도 규격별로 업체의 지원을 받기도 하면서 건축기사가 산출하고 본사에 자재를 청구하여 업체에 제공하였다. 유로폼은 10년 전 서울 둔촌동 현장에 근무할 때 한양주택 현장에서 시공하는 모습을 먼발치에서 보았었다. 해외현장에서는 사용했다던데 국내현장에는 도입초기라서 작업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는 모습을 보며 시큰둥하게 생각하기도 하였었다. 그런데 내동현장의 거푸집공사 업체가 익숙하지는 않지만 시공한 경험만 있을 뿐 자재 소요량을 산출 할 능력은 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유로폼에 대한 경험은 없지만 공급업체의 도움을 받아서 기본판넬과 강관 및 부품의 소요량과 코팅합판으로 제작하는 요철거푸집 및 슬래브거푸집에 필요한 자재수량을 산출하였다. 일부 특수부품도 제작하였지만 거푸집공사가 끝나서 자재를 반출 할 때 보니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부품이 꽤 많이 발견되었다. 작업자가 해당부품을 찾아 헤매느니 합판과 각재로 제작하여 사용하였기에 생긴 일이었다.
본사와 서울근교 현장에서 근무하다가 처음 지방으로 발령을 받은 곳이 대전이다. 초기에는 가까운 성북동 고향집에서 승용차로 출퇴근하였지만 후에 1년은 대전 태평동으로 이사하였다. 딸내미가 초등학교 3학년이고 아들내미가 유치원 다닐 때였다.
계룡/199012
대전 내동아파트현장에서 근무하고 있는데 무전기로 나를 부른다. 인근의 계룡현장에 근무하는 건축 직원이 교통사고가 났다고 하여 급하게 토목공사 현장의 건축직으로 발령을 받았다. 이제까지 건축직이 주가 되는 건축현장에 근무할 때 설비나 전기직 처럼 한 발 물러나있는 입장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일 자체는 다를 것이 없지만 뭔가 소외된 기분이 들곤 하였다. 고향집에서 멀지 않은 곳이기에 요즈음도 가끔 지나게 되는데 주변에 심은 나무들이 무성하여 들어가는 입구만 빼꼼하게 보일 뿐이다.
구미(직업훈련원)/199602
취업 이후 40년이 지난 5년 까지도 기회가 되면 건축 견적업무를 하였다. 건설회사에 근무할 때에는 현장에서 근무를 하더라도 견적작업이 우선이었다. 현장이 개설될 때부터 근무하더라도 현장의 실행예산 작성이 완료되면 새로 시작하거나 문제가 있는 현장으로 다시 발령이 나곤하여 마치 불을 끄는 소방요원 같은 느낌이 들었다. 취업 후 구미현장으로 가기까지 8개 현장을 거치는 동안 처음부터 마감공사까지 마친 현장은 둔촌아파트현장이 유일하다. 구미현장은 현장소장으로 발령을 받은 최초의 현장이었는데 현장소장으로서의 능력이 부족한 탓도 있었겠지만 온전히 끝내 본 현장이 있었냐는 물음에 할 말을 잊기도 했었다.
구미(사원주택)/199602
준공 후 10년쯤 지나서 아파트단지가 들어서며 철거되고 그 자리에 구미광평프르지오(200610 분양)가 들어섰다. 내가 공사에 참여한 가장 단명한 건물이 아닐까?
구미(장폭 부직포공장)/199602
서울집에서 먼 곳이기에 주말부부로 살았다. 초기에는 컨테이너 숙소에서 생활했는데 겨울이 되자 전기난로를 켠 쪽은 뜨겁고 반대쪽은 얼굴이 시릴 정도로 환경이 열악하였다. 그룹사의 주선으로 기숙사의 뜨끈한 방에서 생활하기도 하였지만 마냥 신세를 질 수 없어서 봉한리 삼우아파트에 직원 숙소를 마련하였다. 한창 아마추어무선(HAM/호출부호 DS1CFN)에 심취해 있을 때로 객지생활을 하는데 많은 위안이 되었다. 당시 그룹사의 주차장에는 아마추어무선용 휩안테나를 설치한 차량이 수십 대에 이를 정도로 유행이었다. 아마추어무선사인 건자재 단골집 사장님을 통하여 아마추어무선용품 취급업체와도 가깝게 지내는 등 활발한 아마추어무선 활동을 하였었다. 삼풍백화점 붕괴사고(19950625) 수습과정에서 활약하는 동료 아마추어무선사들의 활동을 무선 통신을 들으며 서울집으로 왔던 기억도 생생하다.
서울 성산동/19970929
현장개설 초기에 아내와 같이 가서 공사현장 출입구 위치를 잡았었다. 공사 중 이미 난지도 쓰레기처리장 철거와 관련된 민원제기 경험이 풍부한 인근 아파트 주민들의 민원제기가 일보다 힘들었지만 준공할 때 축하화분을 가져올 만큼 인근 초등학교와 더불어 공을 들였었다.
인천 영종도 해변/1987
가끔 인천국제공항 남쪽해변길인 영종해안남로를 지날 때면 인천 월미도선착장에서 배 타고 영종도에서 버스 타고 놀러왔던 생각이 난다.
이 흰 점퍼는 대전 내동현장 및 계룡현장에서 근무할 때에도 입고 있었다. 겨울철에 해넘이를 보며 찍었을 텐데 언제 어디인지 모르겠다. 만리포해수욕장과 대천해수욕장과 영흥도 장경리해수욕장 및 십리포해수욕장과 용유도해수욕장은 로드뷰로 확인해 보았는데 아닌 것 같다. 어딘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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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하게 쓰려고 시작하였는데 쓰다 보니 일부는 지우기도 하였지만 생각보다 엄청 길어졌다. 이제 많은 부분이 기억에서 사라졌고 다시 안전진단업체에서 일하기 시작하기 이전의 건설회사 시절의 내용을 쓸 기회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루 종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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