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성북동(산징이고개_옛 등굣길-3)/20191105

 

 

 

097.  말바위에서 좀 내려오니 시야가 탁 트인다.

 

 

 

098.  학창시절에는 진잠이 시골이었지만 대전직할시로 편입되고 아파트단지가 생기며 도시가 되어버렸다.

이 때문에 옛모습을 찾아보기가 더욱 어려워지지 않았을까?

 

 

 

099.  보문산과 식장산

 

 

 

100.  이 부근도 예전 지형과는 너무도 많이 달라져서 짐작할 수조차 없다.

 

 

 

101. 대전농업기술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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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  동창 한ㅇ운네 밭에서 달래를 캤었는데 이 부근쯤 될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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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  영주기도원

확실하게 언제 생겼는지는 모르지만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몇 년인가 지나서 생겨났다.

종교시설이라서 낯설게 느껴졌는데 초기에는 주로 염소를 키웠다.

이 주변에 평소에는 물이 내려가지 않다가도 갑자기 비가 많이 오면 건너기 힘들 개울이 있었다. 

비가 많이 오면 개울을 건너지 못 할까 해서 학교가 일찍 끝나는 날도 있었는데 지금은 어디쯤이었는지 전혀 짐작이 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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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  호남고속도로를 건너가는 토끼굴.

호남고속도로는 1970년 12월 30일 개통되었다니 대학교 1학년을 마칠 때쯤이다.

영주기도원 토끼굴을 지나서 큰구렁까지의 통학로는 호남고속도로가 생기면서 대부분 변경되었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12여년을 걸어 다니던 길을 호남고속도로가 생기고도 7년을 더 걸어 다녔는데도 바뀌기 전후의 모습이 가물가물하다.

토끼굴에 들어서니 예전 느낌이 살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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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  중학교 다닐 때에는 대전 시내버스의 종점이 관저리에 있었다.

말바위에서 내려와서 동창 한ㅇ용네 밭 직전에서 길이 갈려서 사진 중앙의 은행나무가 있는 길을 지나 향교말로 다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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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  작은구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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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  작은구렁

작은구렁 부근으로 고속도로가 지나가며 길이 많이 바뀌었다.

작은구렁이 현재 다니는 길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기에 옛길의 흔적을 찾아서 주변을 살펴보았다.

고추밭 끝의 하단부가 좀 들어간 부분이 유력하리라는 생각은 드는데 주변의 농지가 정리되어서 확실하게는 모르겠다.

또한 작은구렁이라면 주변보다 움푹 패었을 텐데 고속도로공사를 하면서 성토하였는지 오히려 주변보다 높다.

 

옛길 작은구렁 비탈의 사태면에 숟가락으로 구멍을 파고 고구마를 넣고 봉해두었더니 봄에 고구마 순이 나오기도 하였다.

하굣길에 쉬어가는 곳이랄까?  

 

 

 

121.  옛 작은구렁쯤으로 짐작되는 위치에 서서 큰구렁쪽을 바라다보았다.

중간에 논을 가로지르는 냇물이 있었고 냇물을 건너면 밭뚝길이 있었는데 중간에서 쌍암리로 가는 길과 만나서 큰구렁으로 이어졌다.

그 냇가에서 한국동란 때 쓰던 탄알을 가지고 놀다가 친구가 손을 데기도 하고.....

지금 생각하면 정말 위험천만한 일인데 그런 것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논 것이었다.  

쌍암리로 갈라지는 길가의 밭에는 먹음직스런 김장용 무가 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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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  지금은 작은구렁에서 큰구렁까지 호남고속도로 옆으로 길이 났지만 예전에는 이 부근에서 논 가운데 쪽으로 길이 있었던 것 같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부근에서 콩 타작을 하시는 아주머니에게 여쭈어보니 호남고속도로가 생기기 전부터 부근에서 사셨다고 한다.

부근이 농지정리가 되고 방동저수지와 연결 된 수로가 생기는 등 많이 변하였다는데 자세한 것은 기억나지 않으신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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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 큰구렁

사실 작은구렁과 큰구렁이라는 이름을 기억해 낸 것도 불과 몇 년 전이다.

첫서낭에서 신은 장화를 운동화로 바꾸어 신었다.

 

 

128.  큰구렁

예전에는 석축과 아카시나무가 없는 민둥이였다.

아카시나무가 있는 곳쯤은 좀 평평하지만 위쪽과 아래쪽은 직접 올라 갈 수 없을 경도의 급경사였다.

옆으로 중간의 평평한 곳에 가서 놀기도 하고 저학년 때에는 점심시간 이전에 학교가 끝나니 하굣길에 여기서 도시락을 먹었다.

집이 가까운 읍내 학생들과 달리 잣디 학생들은 도시락을 싸 다녔다. 

반찬은 고무마개의 페니실린 병에 참기름과 간장을 넣은 것인데 병을 흔들어서 도시락에 부어서 비벼 먹었다.

얼마 전에 읍내 사는 동창이 이 이야기를 해서 깜짝 놀랐는데 읍내 친구들은 도시락을 싸다니던 우리를 부러운 눈으로 보았던 모양이다. 

모양은 많이 변하였지만 분위기를 느끼기는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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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 교촌리 큰구렁을 지나자마자 길의 왼쪽으로는 김ㅇ환네 집이 오른쪽으로는 박ㅇ범네 집이 있었다.

여기서부터 진잠초등학교까지는 건물과 논 밭이 뒤섞여 있었는데 박ㅇ범네 집 쪽으로 공동우물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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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  하굣길에  뽑기를 해서 난생 처음 만화책을 보았던 문방구를 지나서 진잠초등학교 뒤편까지는 포도밭이었다.

학교와 교장선생님 관사 사이로 난 길을 지나면 교문이 나왔었는데 아마도 관사와 보다 동쪽까지 학교를 넓힌 듯하다.

큰구렁에서 교문까지는 이제는 도로도 여러 개 생기고 건물이 꽉 차서 전혀 옛길을 알아 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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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  교문으로 올라가는 왼쪽에 이ㅇ종네 집이 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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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  진잠초등학교

 

 

 

137.  2013년에 개교 100주년이 되었다.

내가 학교 다닐 때에는 1회 졸업생(동창 민ㅇ구 할아버지)이 한 분 계셨는데  각종 기념일에  참석하셔서 주로 만세삼창을 선창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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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  지금도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전나무?

예전에는 엄청나게 풍성했는데 늙어서 가지치기를 했는지.... 

국기봉이 전나무 부근에 있었는데 조회시간이나 각종 기념식 때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려면 국기를 향하여 '우향우' 구령을 해야 했다.

그러나 어느 선생님의 구령은 항상 '반우향우'라고 하였고,  원래 위치로 가기 위해서는 항상 '좌향좌' 구령을 했던 기억이 난다.

 

 

 

140.  예전에는 이 자리가 경사면에 가깝지 않았을까?

느티나무 노거수 몇 그루도 있었는데 교실을 늘리기 위해서 사라지지 않았을까?

 

 

 

141.  산징이고개에서 진잠초등학교까지는 산장산의 동쪽 기슭이기에 이미 해가 진지 오래 되었다.

차츰 어두워지기는 하지만 40년 전이었다면 성북동집까지 40분 거리니 걸어서 갔겠지만 당연한 듯이 시내버스정류장으로 향하였다.

날이 추워서 잔뜩 웅크리고 앉아서 성북동행 41번 시내버스를 50분 기다려서 탔다.

손님은 4명이 탔는데 원내동 다음 정류장에서 한 명이 내리고 나머지 세 명은 성북동에서 같이 내렸다.

중간의 버스정류장에서는 탈 사람도 없고 내릴 사람도 없으니 그냥 통과하였는데 타고 있는 동안 미안한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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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103 (대전 성북동+동네 한 바퀴+학교 다니던 옛길 걷기+장태산자연휴양림 : 혼자가서 둘이 지냄 : 7박8일 : 416Km) -오후 출발-발산ic-올림픽대로-경부고속-호남고속-서대전ic-성북동(192Km)(1103)--동네 한 바퀴/건너뜸(둘이서 : 1104)--주막거리-웃둥구나무-포강-첫서낭-가운데서낭-산징이고개(성재/성북동산성)-가마길-말바위-영주기도원-작은구렁-큰구렁-진잠초등학교-41시내버스(처음 타 봄)-성북동(학교다니던 옛길을 따라서 걸음 : 혼자서 : 1105)--방동저수지(000 만남)-세점길-봉곡마을-흑석네거리(흑석리역)-장안로-장태산자연휴양림(되돌아서)-장안로-흑석네거리-봉곡마을-세점길-방동저수지-4-진잠(점심+장보기+두더지약)-4-방동저수지-성북동(둘이서 : 1106)--박ㅇ석 다녀감-참취 씨 채취(1107)--서리내림-백일홍 탈색-호박 및 토마토 수확-별채방 창문 방풍작업-스프링쿨러 및 세차호스 철거-샤워장 수도 동파방지 작업-모터펌프 동파방지 작업-열대식물 데크로 옮기고 간이 온실 만듬-화분 창고로 옮김-김장 준비3(1108)--서리내림-꽃 피지 않은 국화 뽑기-김장-볏짚(진치)-대봉 감따기(1109)--본채 방 창문 방풍작업-PC-꽃양귀비+접시꽃 씨앗 뿌림(1110)-참취씨 전달-진치골(진티)-진치고개-중세동-중세교차로-1-삽재교차로-박정자삼거리-월송교차로-23차령로-정안-유천교차로-1세종로-43(비 내리기 시작)-평택대교-길음교차로-강변로-안중-39서해로-양촌ic-42수인로-목감ic-서해고속-서부간선-남부순환-강서면허시험장-

 

 

 

 

산징이고개_옛등굣길-1, -2, -3을 현장답사하는데는 3시간 30분이 걸렸지만 사진을 정리하고 포스팅하는데 2.5일이 걸렸다.

읽어봐도 뭐가 뭔 말인지 모를 수 있겠지만 나의 옛추억을 정리하는 차원에서 기록하였다.

 

Posted by 하헌국
,

대전 성북동(산징이고개_옛 등굣길-2)/20191105

 

 

051.  구슬바위??

가운데서낭에서 등성이를 따라서 곧게 올라오던 옛길이 경사가 완만해지며 바위를 넘어가는 곳에 이른다. 

바위가 평평하지는 않지만 둥글둥글한 표면에는 여러 개의 구슬치기 할 때 팠던 크기의 둥그렇게 패인 곳이 있다.

일설에 의하면 형들이 돌로 팠다고도 하였는데 우리들도 쉴 때에는 돌로 패인 부분을 더 쪼아보기도 하였었다.

확실한 증거를 찾기 위하여 가지고 다니던 작대기로 표면의 낙엽과 흙을 걷어내 보려고 하였으나 역부족하여 포기하였다. 

(분명 이 바위도 이름이 있었을 텐데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포스팅하며 친구인 강ㅇ덕에게 전화로 물어보았더니 모르겠다며, 성북동의 옛 지명을 잘 알고 있는 형님을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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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4.  구덩이가 패인 바위에서 왼쪽 길(화물차가 보이는 도로) 사이의 삼각형 모양의 땅에는 몇 배미의 논이 있었다.

지금은 폐허가 되었지만 산징이고개 정상에 가깝게 작은 면적이지만 논이 있다는 것이 당시에도 신기하게 생각 되었다.

밭벼가 있다는 것도 여기서 처음 보았던 곳이다.

 

 

 

055. 삼각형 모양의 논을 왼쪽으로 끼고 올라가면 드디어 신뜸으로 가는 길과 만난다. 

옛길이 사라져서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사진 가운데 하얗게 보이는 부근의 왼쪽으로 곧게 올라가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056.  웃잣디(신뜸)로 가는 길과 만나는 곳이다.

예전에는 오늘 거슬러 올라온 고향동네인 가운데잣디로 가는 길이 큰 길이고 웃잣디(신뜸)로 가는 길이 작은 길이었다.

지금은 첫서낭에서 공기바위를 거쳐서 오는 이 길은 차량통행이 가능하고 옛길은 폐쇄된 상태이다.

이 길이 차량통행이 가능한 도로로 바뀐 데에는 도로 북쪽으로 공동묘지가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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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8.  예전에는 왼쪽으로 공동묘지가 훤히 바라다 보이던 곳이었는데 나무가 우거져서 지금은 공동묘지가 있는지 없어졌는지도 모르겠다.

초등하교를 다니면서부터 늘 지나다니던 길이였지만 커서도 비 오는 날이나 밤에 지날 때에는 으스스한 생각이 들던 곳이다.

초등학교 6학년 때에는 늦게 하교할 때 산징이고개를 넘기 위하여 솔잎을 팔뚝 크기로 말아 묶어서 불을 붙여서 호호 불며 다니기도 하고,

통조림 강통의 한 면을 트고 반대쪽 원통 면에 큰 구멍을 뚫어 심지를 박은 활명수 병을 끼운 일명 석유 플래시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불을 붙이는 위쪽의 원통 면에는 연기가 나갈 구멍을 뚫었는데 열기도 대단하고 그을음이 엄청나기는 하지만 나름 바람에 강한 장점도 있었다.

모두 건전지를 사용하는 플래시가 귀하던 때의 이야기이고, 그 후로는 ㄱ형 군용 플래시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어린 마음에 C형(대형) 건전지를 넣는 플래시에 B형(중형) 건전지를 종이에 말아서 넣으면 값이 싸니까 절약이 되는 것으로 알기도 하였었다.

 

 

 

059. 성북산성 방향으로 허물어 진듯 한 돌무더기가 보이던 방향인데 나무와 잡풀이 우거져서 전혀 보이지 않는다.

나는 가 보지는 않았지만 돌무더기 위쪽으로 친구 윤ㅇ환네 밭이 있다고 들었다.

 

 

 

060.  산징이고개 정상이 보인다.

산징이고개를 넘어 다니던 사람들은 가운데잣디나 웃잣디(신뜸) 사람들뿐만이 아니었다.

우리들과 반대방향으로 다니는 나무꾼이 있었는데 웃잣디(신뜸) 방향으로 갔다.

인터넷에서 우연히 관련 글을 보았는데 막상 링크를 걸려고 다시 찾으려니 보이지 않는다.

어느 문중에서 나무를 할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던데....

나무꾼들은 형이나 아저씨뻘 되는데 집에서 땔감으로 쓰기 위해서라기보다 장에 내다 팔기 위해서 나무를 하는 것이었다.

나무지게를 받쳐놓고 쉴 때 지나가면 누나 있냐는 둥 짓궂은 질문을 하기도하고 자기들 끼리 뭐가 그리 좋은지 웃기도 하고.....

산징이고개를 혼자서 넘어 다니기에는 위험하기도 하고 무서운 일이었다.

중학생이 되고서나 혼자 넘을 수 있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여학생들은 더욱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을까?

문둥이가 간을 빼 먹는다는 둥, 늑대가 나온다는 둥, 여우가 홀린다는 둥, 공동묘지에서 귀신이 나온다는 둥..... 

 

 

 

061.  산징이고개(잣디고개, 성재) 정상

분수령의 성북동 방향으로 길의 북쪽에 먹지는 않았지만 물이 나서 고여 있는 조그마한 웅덩이가 있었다.

물은 깨끗해 보이기는 하였지만 경사면 바로 위쪽이 공동묘지이기에 먹지 않았다.   

 

 

 

062. 성북동산성 및 산장산 방향으로 가는 대전 둘레 산길 10구간.

예전에는 길이 아예 없던 곳인데 지금은 둘레길이 생겨서 쉽게 오를 수 있다...

성북동이란 동네이름은 백제시대 산성이 있었기에 생긴 것인데 정작 산성에 올라가 보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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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4.성북동산성

 

[출처] 발자국의 미/발걸음 : [성북산성] 황산으로 가는 길(대전 성북동산성).....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lsseol&logNo=30131951446&proxyReferer=http%3A%2F%2Fwww.google.co.kr%2Furl%3Fsa%3Dt%26rct%3Dj%26q%3D%26esrc%3Ds%26source%3Dweb%26cd%3D1%26ved%3D2ahUKEwjLh-Xf-O7lAhUOQd4KHRa0D0YQFjAAegQIABAB%26url%3Dhttp%253A%252F%252Fm.blog.naver.com%252Flsseol%252F30131951446%26usg%3DAOvVaw1qSGTizagN5nDkSKl2DV3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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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9. 그냥 경사가 심해서 침목을 이용하여 계단을 만들었겠거니 생각하고 올라갔다.

그런데 내려오며 생각해 보니 이 경사면이 산성자라였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주변을 둘러보니 경사면이 주욱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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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3.  운동기구가 있는 작은 봉우리.....

 

 

 

074. 운동기구가 있는 작은 봉우리에 오르니 등산객 두 분이 있다.

그중 한 분에게 말을 걸었더니 원내동 샘ㅇ타운에 사시는 분인데 운동 삼아 산장산을 거쳐서 능선길을 따라 성북동산성까지 오셨단다.

꽤 오래 사신 분이기에 이것저것 물어보았는데 대전농업기술센터 방향으로 하산하신단다.

일부 구간이 내가 가는 길과 겹치기는 하지만 사진 촬영하며 여유롭게 가야 할 상황이기에 동행하지는 않았다.

초등학교 들어가서부터 20여년 생활의 일부분으로 넘어 다니던 산징이고개가 운동 삼아 등산하는 길로 기능이 변한 것이다.

이제 잣디 사람들도 외지에 나가려면 산징이고개를 넘지 않고 방동저수지를 거쳐서 1시간 40분마다 다니는 시내버스를 타고 다닌다.

시내버스 노선이 처음 생겼을 때에는 버스를 놓치면 당연히 산징이고개를 걸어서 넘어 다녔는데,

ㅇㅇ는 걷지 않고 막걸리 한잔 마시며 기다렸다가 다음 버스를 타고 오더란다 하는 말이 들리기도 하였던 시절이 있었다.

(잣디 사는 모든 분들이 차만 타고 다니는 줄 알았는데 다음날(1106) 만난 후배님은 버스를 놓쳐서 등산로로 걸어 왔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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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7.  성북산성에 다녀와서 잣디고개를 넘어서 원내동 방향으로 향하였다.

현재의 길은 차량 통행이 가능한 임도로 산징이고개에서 예전 가마길로 가다가 빈계산 방향으로 가는 길이다.  

예전의 산길은 사진 중간에 길이 끊겨 보이는 곳에서 오른쪽으로 골짜기를 따라서 내려가야 한다.

하굣길에 어렵게 꼬부랑길을 올라와서 쉬어가던 곳이기도 하였다.

1958~1964년에 초등학교를 다녔으니 한국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쉬는 장소 부근에서 탄피 등이 심심치 않게 발견되기도 하였다.

대전 용운동 이모님 댁에서 중학교를 다닐 때에는 관저리가 종점인 대전으로 가는 시내버스를 타기 위해서 일요일 저녁 때 이 길을 이용하였다.

갈 때마다 하숙비? 명목으로 쌀을 한 자루씩 지고 다녔는데 산징이고개까지는 어머니와 현재의 성북동집에 사시던 당숙모가 여다 주셨다.       

 

 

 

078. 산징이고개에서 말바위까지 급경사면을 갈지(之)자 모양으로 6~8번 정도 꺾어 내려가던 길이 있었다.

어지간하면 옛길을 찾아서 통과하려고 임도를 왔다 갔다 하면서 내려갈 곳을 찾아보았으나 급경사에 잡풀이 우거져서 접근이 되지 않는다. 

임도를 넓히며 나온 돌들이 비탈면에 굴러 내려갔는지 위태롭게 보이는 돌도 보이고 길이 있었다는 흔적은 보이지도 않는다.

동행이 있었다면 무리를 하였을 텐데 혼자서 가는 길이다 보니 위험한 짓은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기도 하고.....

성북동집 옆집에 사는 안ㅇ권은 이 길을 아리랑길이라 부르던데 나는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다.

 

밤에 혼자서 이 갈지(之)자 길을 걷게 되었는데 한 쪽 방향으로 갈 때마다 같은 종류의 소리가 들려서 머리카락이 쭈삣하기도 했었다.

가까이 갔을 때 무슨 소리인지 확인해보니 마른 갈참나무 잎사귀가 바람에 서로 부딪혀서 나는 소리였다.

 

 

 

079. 가마길 초입

산징이고개에서 급경사면을 갈지(之)자로 내려가는 길로 가지 못하는 대신 가마길로 들어섰다.

학교 다닐 때에도 하굣길에 더러는 경사는 완만하지만 시간이 더 걸리는 가마길을 이용하기도 하였었다.

 

 

 

080.  가마길.

진잠은 조선시대 진잠현(1985년까지), 그 이후로는 진잠군이었기에 동헌이 있다.

자료를 찾아보니 진잠동 행정복지센터 내에 있는 '기성관'이 남아 있다고 한다.

나도 초등학교 저학년 때 한 학기는 진잠향교에서, 한 학기는 진잠동헌에서 공부를 하였는데 동헌 건물이 '기성관'이었는지는 모르겠다.

학교와 너무 가깝고 동헌 진입로 앞에 샘이 있지 않았나 하는 어렴풋한 기억과 너무 차이가 난다.

그건 그렇고....

옆집 사는 안ㅇ권의 윗대 할아버지가 경기도 화성 분이였다고 한다.

안ㅇ권이 우리 아버지에게 들었다는데 윗대 할아버지가 진잠으로 부임하면서 성북동에 정착하셨다는데 그 때 가마길이 생겨났단다.

산징이고개에서 말바위까지 급경사면을 갈지(之)자 모양으로 가는 대신 좀 멀리 돌아가지만 가마가 다닐 수 있는 완만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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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2.  산징이고개에서 가마길을 따라서 내려가다가 예전에 유성으로 걸어가는 산길이 임도가 되었다.

가마길은 여기서 쌍암약수 표지판 방향으로 가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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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5.  가마길이 임도에서 갈라진 초입은 계단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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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8. 쌍암약수터

쌍암약수로 내려가는 길이 말바위 위에 있다는 것이 얼른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예전에는 말바위 조금 아래에서 비탈을 따라 내려가며 샘이 있었다.

학교 다니던 길에서 일부러 물을 마시기 위해서 내려갔다 오기는 좀 멀다는 기분이 드는 거리지만 자주 물을 마시러 다녀왔다.

샘이 있던 장소는 아마도 대전농업기술원 서쪽 본 건물쯤이 아니었을까?

농업기술원 부지 내부이기에 옮기지 않았을까하는 합리적인 생각을 해 본다.

그나저나 말바위 아래에서 내려가는 길이 있으려니 하고 더 내려갔더니 길이 없어서 쌍암약수터에는 가보지 못하였다.   

 

 

 

089. 이 부근에서 갈지(之)자 모양의 길로 이어지는 좀 완만한 샛길이 시작되었는데 흔적이 보이지는 않는다.

 

 

 

090.  말바위 바로 위쪽에서 가마길과 산징이고개로 올라가는 갈지(之)자 모양의 길이 갈라지는 곳이 여기쯤이 아닐까?

몇 발짝 들어가 보았는데 아카시나무 가시가 옷에 걸려서 움직이지 못하겠다.

옷에 걸린 가시를 떼려니 다른 가시가 걸려서 앞으로 나가기는커녕 되돌아 나오기도 만만치 않다.

산징이고개에서 진입하지 못하였기에 말바위 쪽에서라도 들어가려고 했는데 아쉽다.

 

이 부근은 겨울철 등굣길에 고구마를 가지고 와서 덤불 속에 숨겨 두었다가 하굣길에 찾아 먹던 곳이다.

냉장고에서 꺼내먹는 생고구마 맛이랄까? 

 

 

 

091.  말바위

40년??

얼마 만에 보는 말바위인가!

20여년 넘어다닌 옛 등굣길을 걸으며  산징이고개 만큼이나 감동스런 순간이었다.

낙엽을 뒤집어쓰고 있기는 하였지만 말바위의 모습은 예나 다름이 없었다.

 

 

 

092.  말바위

오랜만에 말바위를 타 보았다.

말바위를 탄 모습을 찍어 볼까 궁리를 해 보았으나 여의치 않다.

스마트폰으로 셀카를 찍었으나 말바위는 보이지 않고 내 모습만 덩그러니 찍혔다.

말을 탄 상태에서 바위 모습을 찍으면 내가 말을 타고 보는 풍경이 아닐까 해서 이렇게라도 찍었다. 

산징이고개길을 걸어 다닐 때였다면 어린이들이 여기서 쉴 때마다 너도 타고 나도 타보느라  말바위에 낙엽이 쌓일 틈이 없었을 텐데....

산길이 남아 있으니 운동 삼아 산징이고개를 넘는 어른들이 지나다닐 텐데 말바위를 타는 재미를 모르는지.....

 

 

 

093

 

 

 

094.  산징이고개를 넘어보니 전반적으로 나무가 빽빽하고 키도 커서 전망이랄 것이 없어졌다.

예전에는 어디서 보나 주변의 산야가 훤하게 바라다 보이던 곳이었는데....

 

 

 

095

 

 

 

096.  말바위에서 좀 더 내려가면 길바닥에 있던 바위인데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고학년 때에는 뱀을..... (더는 표현하기가 적절치 않다) 

 



■ 20191103 (대전 성북동+동네 한 바퀴+학교 다니던 옛길 걷기+장태산자연휴양림 : 혼자가서 둘이 지냄 : 7박8일 : 416Km) -오후 출발-발산ic-올림픽대로-경부고속-호남고속-서대전ic-성북동(192Km)(1103)--동네 한 바퀴/건너뜸(둘이서 : 1104)--주막거리-웃둥구나무-포강-첫서낭-가운데서낭-산징이고개(성재/성북동산성)-가마길-말바위-영주기도원-작은구렁-큰구렁-진잠초등학교-41시내버스(처음 타 봄)-성북동(학교다니던 옛길을 따라서 걸음 : 혼자서 : 1105)--방동저수지(000 만남)-세점길-봉곡마을-흑석네거리(흑석리역)-장안로-장태산자연휴양림(되돌아서)-장안로-흑석네거리-봉곡마을-세점길-방동저수지-4-진잠(점심+장보기+두더지약)-4-방동저수지-성북동(둘이서 : 1106)--박ㅇ석 다녀감-참취 씨 채취(1107)--서리내림-백일홍 탈색-호박 및 토마토 수확-별채방 창문 방풍작업-스프링쿨러 및 세차호스 철거-샤워장 수도 동파방지 작업-모터펌프 동파방지 작업-열대식물 데크로 옮기고 간이 온실 만듬-화분 창고로 옮김-김장 준비3(1108)--서리내림-꽃 피지 않은 국화 뽑기-김장-볏짚(진치)-대봉 감따기(1109)--본채 방 창문 방풍작업-PC-꽃양귀비+접시꽃 씨앗 뿌림(1110)-참취씨 전달-진치골(진티)-진치고개-중세동-중세교차로-1-삽재교차로-박정자삼거리-월송교차로-23차령로-정안-유천교차로-1세종로-43(비 내리기 시작)-평택대교-길음교차로-강변로-안중-39서해로-양촌ic-42수인로-목감ic-서해고속-서부간선-남부순환-강서면허시험장-


 

 

Posted by 하헌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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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성북동(산징이고개_옛 등굣길-1)/20191105

 

1958년 진잠초등학교에 입학해서 취직하여 서울로 올라온 1977년도까지 산을 넘어 진잠까지 걸어 다니던 길을 벼르고 별러서 걸어 보았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에는 50분쯤 걸렸고 커서는 40분쯤 걸렸던 3km 정도의 산길인데 오늘은 사진도 찍고 둘러보니라 3시간 30분이 걸렸다.
아예 통행이 불가능한 부분도 있고 일부는 옛 기억과 다른 것 같기도 하는 등 확실하게 생각나지 않는 곳도 있다.
주변 환경이 너무나 많이 변한 탓일까?
그러나 기억에 남아있는 중요한 지점은 거의 찾을 수 있었다.

 

 

001.  배낭 속에는 산에 들어가서 뱀이라도 만날까 해서 장화 한 켤레만 달랑 넣고 출발하였다.

 

 

 

002.  출발하자마자 잡초가 우거져서 새로 난 길로 돌아가야 했다.

탱자나무 울타리 중간에 잔가지 수준의 홰나무(회화나무)가 있었던 지금은 누님 댁이 된 ㅇ순네 집을 지나서.... 

 

 

 

003.  옛길이 잡초로 우거져서 갈 수 없기에 도로를 따라 걸었다.

냇둑이 생기기 전에는 성북2통 마을회관 버스정류장 부근에 샘이 있었고 주변이 질척거려서 개구리가 많았었다.

시내버스가 다니기 시작해서도 주도로가 동편을 지나서 신뜸으로 다녔는데 이제는 냇뚝이 2차선 도로로 변하여 주도로가 되었다.

 

 

 

004.  초등학교 1학년 때 나의 등교 길을 챙겨 준 후견인 노릇을 한 5년 선배인 ㅇ수 형네 집.....

 

 

 

005. ㅇ순에 집을 지나서 지금은 텃밭이 된 무두리 아저씨댁을 지나면 왼쪽으로 그네를 매었던 홰나무(회화나무)가 있었다.

홰나무 아래에서 김ㅇ수와 ㅇ순과 셋이서 소꿉놀이를 하던 기억이 나의 가장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 남아 있다.

 

 

 

006.  공ㅇ표네 집을 끼고 걷다가 밭두렁 길을 거쳐서 동창인 김ㅇ희네 집(밭 가운데 집) 앞으로 가야 하는데 중간에 담장이 생겨서 길이 끊겼다.

 

 

 

007.  이제는 예전 김ㅇ수네 집 앞을 지나서.....

 

 

 

008.  밭 가운데 집을 끼고 돌아가야 한다.

 

 

 

009.  동창인 김ㅇ기네 집을 지나자마자.....

 

 

 

010.  밭뚝길과 도로를 건너서 논뚝길을 거쳐서 웃둥구나무로 가야하는데 길이 없다.

 

 

 

011.  밭뚝길 대신에 같은 시기에 나와 같은 지역인 부산에서 군생활을 한 동생뻘인 김ㅇ덕네 집을 지나서....

 

 

 

012.

 

 

 

013.  주막거리(가운데 둥구나무)로 향하였다.

 

 

 

 

014.  주막거리(가운데 둥구나무)

주막거리에는 내가 성북동에 다니지 않았던 십 수 년 사이에 느티나무 고목 한 그루(평상 위치)가 고사하였다.

성북동에서 내가 보지 못한 일 중에서 가장 허망한 일이 아닐까?

어린 시절에는 사라진 둥구나무 아래에서 우리가 아저씨뻘인데도 ㅇ서방네로 부르던 댁의 늙은 어머니가 눙깔사탕과 마른 오징어를 팔았다.

당시에는 우리동네에서 유일한 상점이었는데 내가 어려서부터 마른 오징어는를  좋아했던 것은 아마도 이 때문이리라.   

(주막거리라는 명칭도 까맣게 있고 지냈는데 다음날(1106) 방동저수지에서 해설하시는 분의 설명을 듣고 상기시켰다.) 

 

 

 

015.  주막거리의 폐허가 된 강ㅇ봉 형네 집을 지나자마자 선돌이 있었는데 보이지 않는다. 동네에 있는 또 다른 선돌은 있는지 알아보아야겠다.

 

 

 

016.  김ㅇ기네 집에서 밭뚝길과 논뚝길을 거쳐서 선돌 앞에서 만난 길은 웃둥구나무로....

여씨 집안에서 관리하는 '은진송씨열녀장려.....  https://m.blog.naver.com/lgs06161/100165858183

 

 

 

017

 

 

 

018.  길고양이 급식소

'이곳은 길고양이 급식소 입니다. 음식물쓰레기나 생활쓰레기를 버리지 말아 주세요. 적발 시 망신당할 것을 예상 하시요.'라는 안내판이 있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 우리가 매일 걸어 다니는 학교까지의 거리가 궁금하였다.

동창들과 5m쯤 되는 새끼줄의 양쪽을 잡고 초등학교 교문 앞에서 웃둥구나무까지의 거리를 재보았다.

잴 때마다 모자에 작은 돌맹이를 한 개씩 담으며 재어보니 2.75Km이었는데 모두들 의외로 짧은 거리라고 생각하였다.   

웃둥구나무에서 각자의 집까지의 거리는 다르기에 공통부분인 웃둥구나무까지를 잰 것이었다.

 

 

 

019.  포강(둠벙)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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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1.  포강에서 보면 약사봉이 가깝게 느껴진다.

 

 

 

022. 포강(둠벙)

수초가 별로 없었었으나 바닥이 진흙이라 물이 그리 깨끗하지는 않았다.

내가 물에 뜨는 수준이나마 수영을 배운 곳이기도 하다.

여름철에는 학교 갔다 오는 길에 여기서 목욕하고 포강 옆의 개천에서 미끌거리는 물때를 닦아야 했다. 

한번은 친구들과 목욕을 하는데 갑자기 주변이 조용하고 노랗게 보이는 것이 아닌가!

정신이 번쩍 나며 내가 물속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친구들은 모두 물에서 나와서 집으로 갔는데 혼자서 물에서 한쪽 방향으로 빙빙 도는 등 만용을 부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어지러워서 땅이 거꾸로 뒤집히는 기분이었는데 다행히 북쪽의 얕은 곳으로 움직여서 살아났다.  

가물 때에는 어른들이 물을 품어서 물고기를 잡기도 하고, 일하러 나온 공병대 군인들이 폭약을 터뜨리면 물고기가 허옇게 뜨기도 하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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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5. 멀리 진치골과 홀목골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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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7.  족제비싸리나무

포강에서 목욕하고 나와서 옆에 있는 냇물로 미끌거리는 물때를 닦았었다.

지금은 다리가 놓였지만 당시에는 징검다리였으며 주변에 족제비사리나무는 예전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028.  지금은 노적봉(공기바위)쪽으로 포장도로가 있지만 예전에는 왼쪽의 비포장 길로 걸어 다녔다. 

 

 

 

029.  친구 강ㅇ덕네 논을 옆에 끼고 본격적인 산길이 시작된다.

산길로 접어들며 배낭에 메고 온 장화로 갈아 신었다.

 

 

 

030. 지금은 사라졌지만 산길 초입의 첫서낭을 지나서....

 

 

 

031 첫서낭을 지나자마자 길에서 느끼는 메마름은 예전과 다를 바가 없다.

지금은 나무가 우거졌지만 예전에는 나무가 거의 없는 황토 흙이었다고나 할까?

 

 

 

032  

첫서낭을 지나자마자 남쪽 방향을 나무 사이로 살펴보니 나의 서류상 등록기준지(본적지)인 감나무골이 보인다.

자세한 주소를 인터넷 지도에서 찾아보니 은행나무가 있는 곳이다.
내가 태어난 곳은 아니지만 할아버지가 사시던 집의 주소인데 그 자리에 건물은 없다.

어려서부터 감너무골이라며 어른들이 말씀하시던 기억은 나는데 이 부근이겠거니 하였지만 지도에서 확인해 보기는 처음이다. 

할머니가 새댁 때 서편에 밭 일 나와서 내가 태어난 집을 짓는 모습을 보며 나는 언제나 외딴집을 면할까 부러워하기도 하셨단다.

그런데 결국 부러워하셨던 그 집으로 이사를 하셨단다. 

 

 

 

033 산길은 있지만 인적이 없고 주변의 나무들은 예전에 비하여 많이 우거졌다.

기억 속에 있는 나무라야 내 키보다 그리 크지 않은 정도의 잡목이었으니 산길 바로 아래 흐르는 냇물은 물론 논과 주변이 훤하게 보였었다.

 

 

 

034

 

 

 

035

 

 

 

036

 

 

 

037.  가운데 서낭 직전에서 남쪽으로 경사면을 내려가면 바위를 타고 물이 흘렀다.

샘물은 아니지만 하굣길에 목이 마르면 내려가서 명과나무(망개나무) 잎이나 손을 모아서 물을 먹던 곳이다.

지금은 가물어서인지 물도 흐르지 않고 폐가구도 버려져 있다. 

 

 

 

038. 가운데서낭

가운데서낭도 사라졌지만 예전에는 경사가 완만한 새길 위쪽으로 경사가 급한 돌길이었는데 흔적만 남아 있다.

 

 

 

 

039. 가운데서낭을 지나는 원래의 길은 사진에서 미국자리공이 있는 곳이었다.

 

 

 

040

 

 

 

041.  가운데서낭 부근에 있는 바위인데 전혀 기억을 하지 못한 상태에서 발견하고는 혼자말로 '그래.... 있었지....'라고 되뇌었다.

 

 

 

042. 가운데서낭에서 산징이고개로 올라가는 길은 도로가 오른쪽으로 구부러지는 중간쯤(사진 중앙)에서 나무 사이로 옛길이 시작었다.

오래 전에 왼쪽으로 사유지에 철조망 울타리가 생기며 원래의 길이 사유지로 들어가며 새로운 길이 생긴 것이다.  

 

 

 

043.  소띠끼며 놀던 바위

가운데서낭에서 50m 올라가다가 옛길에서 왼쪽으로 조금 떨어진 위치에 넓고 평평한 바위가 있다.

이 바위를 보기 위해서 철조망 울타리를 따라서 올라갔다 내려왔다 하면서 사진을 촬영할 시야가 트인 곳을 물색하였다.

워낙 잡풀과 가시덤불이 우거져서 한 발짝을 옮기는 것조차 어려워서 나뭇가지 작대기로 헤치며 움직여야 했다.

예전에는 큰 나무가 거의 없는 시야가 트인 지역이라서 소띠끼기 좋은 곳이었는데 나무도 크고 풀이 우거졌다. 

바위에 접근 할 수는 없었지만 칡덩굴로 뒤덮이기는 하였지만 옛 모습이 새롭다.

(분명 바위 이름이 있었을 텐데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아서 포스팅하며 친구인 강ㅇ덕에게 전화로 물어보았더니 모르겠단다.) 

철조망 울타리에 있는 탱자나무에서 탱자가 많이 떨어졌기에 몇 줌을 배낭에 담았다. 

 

초등학교 여름방학 때는 15시쯤 되면 소를 몰고 와서 가운데서낭에서 고삐를 놓아주면 알아서 풀을 뜯어 먹으며 골짜기를 따라서 올라간다.

친구들이 각자 자기집 소를 몰고 와서 소가 풀을 뜯어먹는 동안 어두워질 때가지 이 바위 부근에서 같이 놀았다.

어떤 날은 노는데 정신이 팔려서 날이 어두워지는 것도 모르고 놀다보면 소들도 무서운지 한군데 모여 있기도 한다.

소가 풀을 뜯어 먹을 때에는 목에 달아맨 방울이 뎅강뎅강 소리를 내는데 한군데 모여 있을 때에는 무서운지 방울 소리도 내지 않는다.

소를 다룰 수 있는 고학년 때에나 가능한 일이지만 여름철이라도 일찌감치 그늘이 지는 곳이기에 바위의 따뜻함을 맛 볼 수 있기도 하다.  

바위 왼쪽(가운데서낭 위쪽) 비탈에는 깨금나무(개암나무)가 있었는데 여름방학이 끝날 무렵에나 깨금이 익어서 따 먹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른 봄이면 깨금나무 부근에서 칡을 캐기도 하였던 곳이다.

 

 

 

044.  새로 난 길을 따라서 올라가니....

 

 

 

045

 

 

 

046. 철조망 울타리가 망가져서 사유지 안쪽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곳이 있다.

옛길이 어디쯤 있었을까 궁금하기도 해서 들어가 보았는데 전혀 짐작이 가지 않는다.

다만 가운데서낭에서 등성이 중간쯤으로 곧은길이었다는 기억이 어렴풋하다.  

 

 

 

047

 

 

 

048.  철조망 울타리

 

 

 

049 

 

 

 

050.  사유지 부분을 빠져 나오니 시야가 트이고 첫서낭에서 갈라져서 공기바위를 지나 산징이고개로 가는 도로와 만나는 곳이 가까워졌다.

 

 

 

■ 20191103 (대전 성북동+동네 한 바퀴+학교 다니던 옛길 걷기+장태산자연휴양림 : 혼자가서 둘이 지냄 : 7박8일 : 416Km) -오후 출발-발산ic-올림픽대로-경부고속-호남고속-서대전ic-성북동(192Km)(1103)--동네 한 바퀴/건너뜸(둘이서 : 1104)- -주막거리-웃둥구나무-포강-첫서낭-가운데서낭-산징이고개(성재/성북동산성)-가마길-말바위-영주기도원-작은구렁-큰구렁-진잠초등학교-41시내버스(처음 타 봄)-성북동(학교다니던 옛길을 따라서 걸음 : 혼자서 : 1105)--방동저수지(진잠지도 제작팀 만남)-세점길-봉곡마을-흑석네거리(흑석리역)-장안로-장태산자연휴양림(되돌아서)-장안로-흑석네거리-봉곡마을-세점길-방동저수지-4-진잠(점심+장보기+두더지약)-4-방동저수지-성북동(둘이서 : 1106)--박ㅇ석 다녀감-참취 씨 채취(1107)--서리내림-백일홍 탈색-호박 및 토마토 수확-별채방 창문 방풍작업-스프링쿨러 및 세차호스 철거-샤워장 수도 동파방지 작업-모터펌프 동파방지 작업-열대식물 데크로 옮기고 간이 온실 만듬-화분 창고로 옮김-김장 준비3(1108)--서리내림-꽃 피지 않은 국화 뽑기-김장-볏짚(진치)-대봉 감따기(1109)--본채 방 창문 방풍작업-PC-꽃양귀비+접시꽃 씨앗 뿌림(1110)-참취씨 전달-진치골(진티)-진치고개-중세동-중세교차로-1-삽재교차로-박정자삼거리-월송교차로-23차령로-정안-유천교차로-1세종로-43(비 내리기 시작)-평택대교-길음교차로-강변로-안중-39서해로-양촌ic-42수인로-목감ic-서해고속-서부간선-남부순환-강서면허시험장-

 

 

 

 

Posted by 하헌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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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성북동(가을 꽃밭-4)/20191105

 

어린 시절 여름철이면 저녁밥을 먹고 가족끼리 혹은 친구들과 모기를 피하려고 고향집 앞 갱변(성북천)에서 멍석을 펴고 지냈다.

멍석에 누워서 이야기도 듣고 하늘 가득히 초롱초롱 빛나는 별을 보다가 밤이 깊어서 이슬이 내리면 멍석을 접어놓고 집으로 들어왔다.  

이 때문인지 별을 보는 것이 자연스럽게 취미가 되었고 내 자신의 여건도 감안하여 망원경보다는 손쉬운 고정촬영을 좋아하게 되었다.

주변 풍경의 윤곽 정도를 사진 하단에 조금 넣고 밤하늘을 촬영하려니 카메라 렌즈는 화각이 넓은 광각렌즈를 장만하게 되었다.

카메라와 함께 장만한 16~35mm 줌렌즈는 주로 사용하는데 왜곡현상이 많기는 하지만 일반사진에서 주제를 강조하기 좋은 장점도 있다.

단렌즈와 달리 화각을 조정하기 쉬워서 편리성 차원에서 별사진 이외의 사진도 광각렌즈를 많이 사용하는 편이다.

그러나 가끔은 표준렌즈로도 촬영하고 싶은 생각에 50mm 단렌즈를 구입하였는데 크기도 작고 가볍고 상이 예리해서 딸네미가 주로 쓴다.

어제는 16~35mm 광각렌즈로 촬영하였으니 오늘은 50mm 표준렌즈를 통해서 성북동집 꽃밭을 보기로 하였다.

 

 

백일홍

 

 

 

 

 

 

 

 

 

 

 

 

 

 

 

 

 

 

 

매리골드

 

 

 

산부추

 

 

 

국화

 

 

 

꽃송이가 볼모양을 이루고 있어서 가장 좋아 보이는 국화.....

 

 

 

 

 

 

 

 

 

 

 

 

 

 

 

 

 

 

 

8일 전에 딸내미가 촬영한 사진(아래 사진)과 비교해 보니 가까이 보이는 무더기는 모두 흰 꽃이었는데 보라색으로 변해단다.

아래쪽의 흰 꽃은 8일 전에는 꽃봉오리 상태였던 것이 새로 핀 것이니 이 또한 시간이 지나면 보라색으로 변하지 않을까?

멀리 보이는 무더기는 시간이 지날수록 보래색이 옅어지고 있다고 아내가 일러준다.  

 

 

20191028 촬영

 

 

 

 

 

 

 

 

 

 

 

어제는 채반에 감말랭이가 가득했는데(아래 사진) 완전히 마르지 않아서 약간 떫은데도 오매가매 집어먹다 보니.....

 

 

 

 

 

일찍 피었던 국화는 시들기 시작하고.....

 

 

 

목화

 

 

 

 

 

 

 

 

 

 

 

이제서 꽃이 피는 목화도 있다.

 

 

 

 

 

 

 

여름철에는 별 피해가 없어서 괜찮은가 했는데 작년 못지않게 두더지가 꽃밭을 쑤셔놓았다.

작년에 사 두었던 두더지 약을 다 썼기에 다시 구입하였는데 작년과 같은 가격인 한 병에 7,000원이다.

막상 약을 사용하려고 뚜껑을 열었더니 한 알의 크기가 작년에 구입한 것보다 세 배 정도 크다니 얼매나 오른겨?

딸내미는 어려서 두더지와 사람이 고구마 줄기로 줄다리기를 하는 동화책을 읽은 세대답게 두더지를 잡아야 한다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한다.

농작물을 심은 것은 아니지만 두더지가 들쑤시니 화초와 어린 나무의 뿌리가 말라서 죽어버린다.

꽃밭에 물을 자주 주면 괜찮을지 모르겠는데 성북동집에 상시 거주하지 못하는 형편이다 보니 피해가 크다.

아마도 남쪽 꽃밭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국화가 작년에 이어서 올해도 꽃이 피지 않는 것은 두더지 때문이리라.

우리집 꽃밭 뿐 만아니라 집 앞의 밭에도 두더지가 쑤셔놓은 흔적이 많은데 두더지를 없애는 좋은 방법이 없을까?

     

 

 

성북동집 앞의 밭에서 수확한 누님네 고구마, 번번이 잘 얻어먹는다.

동화처럼 두더지와 줄다리기를 해서 이긴 것인가??

 

 

 

 

 

  모든 사진을 50mm 렌즈로 촬용

Posted by 하헌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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