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한 바퀴-1(대전 성북동)/20240702

 

하루 종일 비가 내리지는 않지만 장마철이라 매일 비가 내린다. 비가 그친 사이에 뭔가 일을 할 수는 있겠지만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밭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 좋다.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니 졸리면 낮잠도 자고 딩굴거리며 지내다보니 운동량이 턱없이 적다. 온몸이 뻑적지근하고 뱃속도 편치 않은데 비가 그친 저녁 때 아내가 산책이나 하자고 한다. 아내는 동네 누님과 새벽마다 운동삼아 걷고 있는데 요즈음은 비가 내려서 나가지 못하고 있던 참이다. 아내가 운동하는 코스를 80분 정도 걸었다.

 

  성북1통

 

금수봉

 

 

약사봉

 

 

국립대전숲체원 가는 길가에 꽃을 많이 키우는 집을 지나서....

 

 

 

 

 

큰길에서 벗어나서 옛길로 성북1통(신뜸=웃잣디) 동네로 들어섰다. 우리 동네(가운데잣디)보다 나중에 생겨났으니 신뜸이라 부르지 않을까? 성북동산림욕장이 있는 새뜸은 신뜸보다 나중에 생겼으리라.

 

 

 

 

 

성북1통 마을회관 앞에 등나무 파고라가 있는데 등나무(사진 없음)가 엄청나다. 내가 초등하교 입학하기 1년 전(1957년도?)쯤 마을회관 옆에 공동 목욕탕이 생겨났다. 목욕통은 대형 가마솥이었는데 당시 도로가 없던 시절이라 새운내(현 방동저수지 수몰지역)에서 성북천을 따라 우리집 앞까지만 차로 운반하여 한동안 방치되어 있기에 기억한다. 이름으로보아 성북2통보다 나중에 생긴 동네겠지만 양말과 장갑을 짜는 가내수공업공장도 있었다. 

 

 

 

 

 

 

 

 

셩할머니(=수영할머니)댁이 이 부근에 있었다. 형제 중 누군가 아프면 해물린다고 모시러 오는 심부름을 하기도 했었다. 해물릴 때는 주문을 외며 부엌칼로 환자의 몸을 여기저기 도려내서 바가지에 담는 시늉을 하고, 창호지 바른 문짝의 문살을 드르륵 소리 내며 칼로 그어서 귀신이 놀래서 물러나게 한단다. 이제 오래된 기억이라 가물가물하지만 떡 해놓고 비는 등 여러가지 행사가 있었다.

 

 

 

 

 

구체적인 위치는 모르겠지만 기업체(D연필) 땅이 부근에 있단다. 우리집 옆 밭인 땅콩할먼네도 그 부지에 사셨단다. 예전에 있던 주택이 철거된 곳에는 은행나무를 심었다. 여기가 아닐까?  

 

 

 

 

 

 

 

 

  성북2통

 

 

 

 

예전에 아버님이 농사지으시던 포도밭이다. 추억거리가 많이 남아있는 곳이다.

 

 

모시풀

한 때는 모시풀 농사도 지으셨는데 그 잔재가 아직도 남아있다. 

 

 

 

 

 

 

 

 

 

 

 

싯집매(=셋집매?)

1970년대 말까지 주택 3채가 있던 지역이다. 비닐하우스 좌측과 주택 사이로 빼꼼하게 보이는 돌기와집이 남아있다. 60여년은 되었으리라. 

 

 

 

 

 

여I환네 옛집

 

 

오S수네 집터 

 

 

우리집 앞의 성북천 둑길이 생기기 전에는 우리 동네의 주도로였다. 노인보호구역 표지판은 아마도 재작년(2022년도) 쯤에 생기지 않았을까? 

 

 

 

 

 

방앗간(정미소)

물방앗간이 폐쇄되며 발동기를 동력으로 한 방앗간으로 대학교 다닐 때 방앗간에 대한 리포트를 쓰기도 했었다. 아버님이 방아 찧으러 가셨다가 사고로 화상을 입기도 했었다.

 

 

쌍둥이네 옛집터

동네에서 가장 부잣집이었다. 내가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에도 축음기와 건전지로 작동하는 진공관식 라디오가 있었다. 당시 라디오가 있던 집은 백Y기네와 두 집뿐이었다. 건전지를 바꿀 때쯤에 버린 건전지를 주으러 다녔다. 진공관용 건전지는 A전지와 B전지로 구성되어 있다. B전지는 병렬로 연결된 육면체로 되어 있어서 쓸모가 없었지만 A전지를 분해하면 흑연봉이 나온다. 흑연봉을 땅바닥이나 돌에 그으면 연필처럼 검게 칠할 수 있다. 쌍둥이네 집에는 우물가에 우리 동네에서 유일한 자목련이 있었다. 그리고 태엽을 감아서 작동하는 유성기가 있었다. 가끔 버린는 유성기 바늘을 얻어오기도 했었다. 옛집은 수년 전에 화재로 소실되고 집터도 주인이 바뀌었는데 올 봄에 큼직한 주택을 지었다.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시절에 동네 골목길 넓히는 부역 작업을 나와서 하수구를 팠던 지역이다.

 

 

 

 

 

성북2통 마을회관

 

 

 

 

 

 

 

 

 

 

 

 

 

 

 

 

 

 

 

 

주막거리(=가운데둥구나무)

 

 

강S덕네 비닐하우스

 

 

 

 

 

 

 

 

웃둥구나무

 

 

 

 

 

친구가 오이를 이렇게 키우고 있다.

 

 

 

 

 

 

 

 

 

 

 

 

 

 

 

 

 

 

 

 

 

 

 

 

 

 

 

 

 

 

 

 

 

 

 

 

 

 

 

 

 

 

 

 

 

 

 

 

 

 

 

 

 

 

 

 

 

 

 

 

 

 

 

 

 

 

 

 

 

 

 

 

 

 

 

 

  아내가 동네 누님과 새벽에 한 시간 가까이 운동을 다니는 코스로 한 바퀴 돌았다. 둘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걷는다는데 누님은 지나는 길에 보이는 논밭과 폐허가 된 주택까지도 사연을 줄줄이 꾀신단다. 벽체만 남은 주택 잔재를 보며 이 집은 아들이 넷이었는데 한 끼 식사로 국수를 한 관 삶았다고 하더란다. 무너진 논두렁을 바로 복구하지 못하는 후손들 이야기며, 도로변 논을 성토 작업하여 밭으로 만든 사연 등.... 

그런데 나는 서울에서 취업하여 1985년도부터 지금까지 같은 동네에 살면서 가끔 기존 건물을 철거하는 현장을 보곤 한다. 그때마다 아내나 나나 거기에 어떤 건물이 있었는지 어떤 가게가 있었는지 생각이 나지 않아서 서로에게 묻곤 하였다. 아내의 견해로는 시골 사시는 누님의 기억력이 좋고 도시에 사는 우리들의 기억력이 나빠서가 아니라 거기에 사람이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란다.  인간적인 커뮤니케이션이 있고 없고의 차이란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Posted by 하헌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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